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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설악산 일대2

by 장돌뱅이. 2022. 6. 18.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준비한 우비와 우산으로 대비를 하고 출발을 했다.
이슬비여서 빗발은 세지 않았다. 누군가 이슬비와 보슬비의 차이를 물었다.
나중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았다.

이슬비 : 아주 가늘게 내리는 비, 는개보다 굵고 가랑비보다는 가늘다.
보슬비 : 바람이 없는 날, 가늘고 성기게 내리는 비

설명 중에 나오는 는개는 기억해두고 싶은 예쁜 우리말이다.
는개는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를 말한다. 안개비는 "빗줄기가 가늘어서 안개처럼 부옇게 보이는 비(무우霧雨)"고, 가랑비(삽우霎雨, 세우細雨)는 이슬비보다 좀 굵고 가늘게 내리는 비다. 그러니까 사전을 기준으로 약한 비부터 적어보면 대략 이렇겠다.
안개비 <는개 <이슬비, 보슬비 <가랑비 <장대비(작달비).

사전의 정의를 알아도 실제 이 날  아침 내리는 비가 어떤 비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외에도 사전에는 여러 가지 비에 관련된 말이 많다.
예를 들면, 여우비·단비·모종비·목비·발비·밤비·장마비·소나기·큰비·궃은비·찬비·빗발·빗날·비바람·비빌이·빗줄기·빗방울·빗소리·빗밑·빗낱·장마·건들장마 등등.

아마 옛날에는 비가 지금보다 더 농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므로 관련된 말들도 발달했을 것이다. 언어는 환경을 반영한다. 에스키모어에는 눈에 관한 어휘가, 아랍어에는 낙타에 관한 어휘가, 그리고 몽골어에는 말에 관한 어휘가 많이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글이 샛길로 빠졌다.
아무튼 이날 평일에 비까지 겹친 덕에 이제까지 설악산을 찾은 이래 가장 적은 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넓어진 길을 독차지하고 영화 "범죄와의 전쟁" 포스터처럼 횡대로 걸어보기도 했다.

오늘은 목표는 천불동 계곡 초입에 있는 비선대. 편도 2.8km에 길도 편평하여 가벼운 산책이었다.
밤새 내린 비에 계곡물이 불었는지 걷는 내내 물소리가 크게 귀에 울렸다.

대청봉에 오르지 못한 사람도 대부분 비선대에 얽힌 기억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지는 경주 아니면 설악산이었으므로.
비선대(飛仙臺)는 그 아래쪽 와선대(臥仙臺)에서 바둑과 거문고를 즐기던 마고선이라는 신선이 하늘로 올라간 곳이라는 전설을 갖고 있다. 계곡 반석을 따라 크고 작은 폭포와 소(沼)가 있고 계곡물이 굽이쳐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설악산 비선대 옆 오래된
물푸레나무를 만났네.
나무는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사람들이 흘린 말소리 발자국 소리에
혼탁해진 물을 지켜보고 있다네
어둠이 깊어지면 물푸레나무는

물 . 푸 . 레 . 물 . 푸 . 레 
비선대 물속 깊숙이 푸른 가지를 내려
가슴에 잎사귀를 달아주며 새벽마다
물을 푸르게 키우고 있다네

나의 팔이 지친 너의 가슴에 닿아
너의 몸에 푸른 잎을 달아준다면
우리들 영혼이 푸른빛으로
세상을 눈부시게 한다면
물푸레나무가 비선대 바위 틈새에서

천 년 지킴이가 되어
물 . 푸 . 레 . 물 . 푸 . 레 

사랑하는 이 가슴에 푸른 잎사귀를
달아 주는 일이라는 걸
설악산 비선대를 오르다가

오늘 우연히 만난 물푸레나무한테
사랑법을 배웠네


-  권정남, 「물푸레나무의 사랑법」-

물푸레나무는 물에  가지를 담그면 물을 푸르게 물들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 사실을 어디선가 들었고, 위 시도 읽었지만 정작 비선대에서는 물푸레나무를 보지 못했다.
아니 나는 사실  물푸레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보았어도 지나쳤을 수도 있다.

물푸레나무는 못 보았어도 비선대 너럭바위를 흐르는 물은 푸른빛을 띠었다. 사십 년 가까이를 부부로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김태정의 시) 살아온 일행들의 얼굴에도 각자 물푸레나무 같은 아내며 남편들이 풀어놓은  푸른빛들이 어른거렸다.

해물뚝배기로 점심을 하고 영랑호 둘레길을 걸었다.영랑호는 해안 사구가 발달해 형성된 자연 석호다.
둘레가 7.8km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호수 중간을 가로지르는 부교를 건너 둘레길의 절반인 위쪽 길을 걸었다. 날은 흐렸지만 비는 점차 그쳤다. 호수를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했다.
둘레길 곳곳에 산불로 인해 폐허가 된 집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새삼 산불의 위험성을 깨닫게 했다.

숙소로 돌아와 다시 술자리를 이어갔다. 첫날과 달리 아내들은 조강지처답게(?) 만류를 했지만 우리 '조강지남'들은 몽니 부리는 개구쟁이들처럼 구박을 받아가면서도 꿋꿋하게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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