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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한여름 한낮 - 덕수궁과 그 부근

by 장돌뱅이. 2022. 8. 4.

민어탕은 여름철 음식이다. 민어가 여름에 알을 낳기 때문이다. 봄철 도다리쑥국으로 유명한 을지로 입구에 있는 식당 충무집에서 계절 음식으로 민어탕을 낸다. 외출을 했다가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민어탕을 미끼로 아내를 불러냈다.

민어탕에는 원래 부레, 간 등의 내장이 들어가야 제맛이라고 한다. 충무집 민어탕에는 살덩이만 들어 있다. 그래도 구수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입에 붙는다.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시원한' 민어탕 한 그릇을 하니 한여름 더위가 만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벌써 팔월인데 까짓 더위라고 해봤자 이제 며칠이나 남았겠어?"
자못 호기롭게 아내에게 말해 보았다.


민어의 원래 이름은 면어, 면은 조기 면(鮸)이다. 민어와 조기는 사촌지간이다. 면의 중국식 발음이 민과 가까워서 복잡한 '면' 대신 획이 간단한 백성 민(民)을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자산어보』에는 그 맛이 조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나와 있다지만 나로서는 긍정할 수 없다. 시인 안도현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회는 민어회, 가장 맛있는 매운탕은 민어탕이라고 했다. 맛에 정답이 어디 있으랴.
함께 먹은 멍게비빔밥의 향긋한 바다 냄새도 민어탕과 잘 어울렸다.

젊어 한 때 식후 끽연이 필수였던 때가 있었다. 요즈음은 카페가 그런 것 같다. 잔잔한 음악과 나른한 분위기, 커피와 달달한 디저트를 아내와 나누는 시간에 언제부터인가 시나브로 빠져들게 되었다. 충무집에서 멀지 않은 카페 적당(赤糖)에서 팥으로 만든 양갱과 차를 마셨다.

백수가 된 후 '단골'이 된 도서관에도 잠시 들려보고, 길을 건너 맞은편에 있는 덕수궁으로 갔다.
입구는 큰 공사 중이어서 대한문의 현판을 옹색한 각도에서만 볼 수 있었다.
(*지난 글 참조 :
전시회 "대한제국 황제의 식탁")

정전인 중화전을 둘러보는 동안 간간히 여우비가 뿌렸다.
잠시 처마 아래서 피했지만 더위까지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날렵한 지붕선의 중화전과 넓은 마당(朝廷)과 초록의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에 마음은 시원했다.


드무는 '넓적하게 생긴 독'이라는 우리말이다. 궁궐에서는 물을 담아두어 화재를 막기 위한 상징물로 쓰인다. 화마(火魔)가 왔다가 드무 속 물에 비친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보고 놀라서 도망치게 된다는 것이다. 중화전 앞에는 두 개의 드무가 있다. 금석문이 각각의 몸통에 새겨져 있다.
그중 하나는 이렇다.

"국태평만년(國泰平萬年)"
(나라가 태평스럽게 만년토록 오래 지속돼라.)

그런 바람이야 지금도 간절하지만······

석어당(昔御堂)은 2층의 목조건물로 임진왜란으로 피난 갔던 선조가 환도해 1593년부터 머무른 곳이다. 석어는 '옛날에 임금이 머물렀다'는 뜻이다. 궁궐 건물로는 특이하게 단청이 없다 이런 건물을 백골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선조는 끝내 원래의 궁으로 환궁하지 못하고 16년을 이곳에서 지내다 1608년에 승하했다. 이곳은 또 광해군이 1618년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곳이고 불과 5년 뒤 인조반정 때는 광해군 자신이 문책을 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석어당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살짝 물러나 있는 즉조당(卽阼堂)의 '즉'은 '나아가다', '조'는 '임금의 자리'라는 뜻으로 '즉위'와 같은 말이다.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준명당(浚明堂) 은 즉조당과 짧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곳으로 쓰기도 하고 침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준명'은 '다스리는 이치가 맑고 밝다'는 뜻이다.

석조전 앞에는 배롱나무 꽃이 만발해 있었다.
배롱나무 꽃은 예전엔 남도 여행을 할 때 만날 수 있었는데 기후 온난화 탓인지 이젠 남한 도처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꽃그늘로 다가서려니 또 다시 여우비가 내렸다. 자꾸 반복되니 비가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꽃과 햇살에 빗방울이 어우러져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아 오히려 좋았다.


해나고도
비 온다.

그늘진 빗방울 작은 방마다
모처럼
햇살이 가득 들어찼다.

노오란 여우 눈이
낮불을 켰다.

마을이
온통
환하다.

- 이상교, 「여우비」-

정관헌(靜觀軒)은 덕수궁 후원 언덕에 세워진 휴식용 건물이다. '정관'이라는 말 그대로 조용히 숲과 궁궐을 내려다보며 멍때리기에 좋은 장소 같았다. 고종은 여기서 커피를 마시고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지난 글 참조 : 덕수궁 정관헌의 박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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