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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설악산 일대(끝)

by 장돌뱅이. 2022. 6. 19.

아침에 비가 그치고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행이 함께 움직이지 않고 세 부부가 각각의 계획에 따라 따로 움직이는 날이다.

함께 여행하되 각자의 일정을 넣거나, 각자 여행하면서 전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방식은 오래전 활동했던 한 여행 동호회에서 실행한  적이 있다. 항공권은 공동구매를 하고 여행지의 숙소와 일정은 개인별로 하되 여행 중 몇 번은 전체가 함께 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그때는 인원이 10명(?) 이상인가가 되면 항공사와 직접 네고를 하는 것이 가격적으로 이점이 있었다.),   모든 것을 개인이 알아서 하되 비슷한 시기에 같은 여행지를 여행하면서 몇 번의 ('번개') 모임을 갖기도 했다.
개별 여행이 주는 오붓함과 전체 여행이 주는 축제 분위기를 함께 즐기려는 아이디어였다.  

아내와 나는 북설악 쪽 화암사숲길을 올랐다.
다른 두 부부는 각각 울산바위와 바닷가길을 걷는다고 했다.

화암사숲길은 화암사를 기점으로 성인대(신선대)를 돌아오는 4.1km의 원점 회귀형 산길을 말한다.
우리는 수바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40분 정도 경사길을 올라야 능선에 닿는 길이었다.
능선의 성인대 바위에서는 울산바위와 동해바다의 웅장하고 거칠 것 없는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미시령 위쪽으로 굽이치는 백두대간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간혹 세찬 바람에 놀라 모자를 움켜잡아야 했지만 그마저도 마음 깊은 곳까지 후련하게 씻어주는 청량제 같았다.

울산바위는 울산에서 금강산으로 향하던 바위가 주저앉아 울산바위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울산 현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이 바위에 대한 세금을 신흥사 주지에게서 매년 받아갔다. 이에 한 영리한 동자승이 울산 현감에게 "바위를 가져가든지, 아니면 자릿세를 내라"고 했다. 울산 현감은 지지 않고 재로 꼰 새끼로 묶어주면 가져가겠다고 하였다. 동자승은 지금의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에 많이 자라는 풀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맨 뒤, 불을 붙여 재로 꼰 새끼처럼 만들었다. 결국 울산 현감은 바위도 세금도 가져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풀을 가져온 땅을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를 합하여 '속초'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점심은 메밀막국수로 했다. 아내는 비빔국수, 나는 물국수.
아내는 만족해 했고 아내가 만족하면 나는 늘 만족이다. 

천학정

식사를 하고 나도 아직 숙소 체크인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근처 천학정을 찾아보았다.
원래는 청간정(淸澗亭)을 가보고 싶었지만 공사 중이었다. 천학정(天鶴亭)은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 해안가 작은 산에 있다. 1931년 이 고장 유지들이 세웠다고 한다. 정자 안에 들어 보았지만 앞바다에 방파제가 세워져 있어 시야가 걸렸고 전체적으로 뭔가 옹색한 분위기의 정자였다.

아야진해수욕장

숙소로 오는 길에  아야진 해변에 잠시 들린 건 순전히 「아야진」이라는 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해변에는 벌써 텐트를 치고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여름이 왔다!'는 실감을 하게 해 주었다.


멀리 와서 바다를 본다

아팠구나

저리도 많은 손 갈퀴가 몰려와
모래를 긁어대는 것은
아직도 못 다한 얘기가 남아 있기 때문

얘기를 안 하면 귀신도 모른다 했는데
귀신의 입과 귀도 막아버리고
검은 파도가 친다

내려놓자

내 것이 아니어서
슬펐던 것들

산도, 별도
골짜기를 떠돌던 반딧불도
반딧불 같았던 여인도
내려놓는다

미안하다

멀리 와서 
비로소 바다에 닿았구나

- 이홍섭, 「아야진」-

아야진은 '아야'라는 음상(音像)이 아픔을 떠올리게 한다. 여느 바닷가와 특별히 다르진 않았지만 시인은 이곳에서 슬프고 아팠던 것들을 내려놓고 싶었나 보았다. 우리도 잠시 '내 것이 아니어서 슬펐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새삼스런 자각만을 얻었을 뿐이지만.

숙소는 천진해수욕장에 접해 있어 방 안에서도 시원스러운 수평선이 창문 가득히 보였다. 그것 하나만으로 나머지 단점이 다 상쇄가 되었다. 창 가까이 둥그런 욕조가 있었다. 손자친구가 있으면 장난치기 좋겠다는 설계자의 의도와는(?)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일행이 오기까지 일층 카페에 커피를 시켜두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읽던 책을 덮어두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뭔가가 가득해지는 듯한 감미로운 시간. 
여행에서도 삶에서도 여백이 필요한 이유겠다.
해변에 파라솔과 접이식 의자를 펴고 바다를 바라보는 젊은 커플의 모습이 한가로움을 더해주었다.

바닷가에 왔으니 회를 거를 수 없어 포장을 해 왔다.
술을 안 먹으려(?) 했지만 회가 있고, 여행의 마지막 저녁이라는 '프리미엄'도 더해지니 어쩔 수 없었다.
(술 먹을 핑계는 늘 많다.^^)


이튿날 새벽  일출을 보러 나갔다. 5시 경이되자 수평선 끝에서 불에 달군 쇠 같은 것이 빼꼼히 머리를 내미는가 싶더니 이내 동그란 해가 되어 떠올랐다. 친구는 그것을 '똑 떨어진다'고 표현했다. 꽤 오래간만에 보는 선명한 일출이었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난 후 친구들과 헤어졌다. 아내와 나는 권금성을 가보려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설악동 입구에서부터 차가 막혔다. 바로 차를 돌려 나와 집으로 향했다. 권금성이 더해지거나 빠지거나에 상관없이 이미 아침 일출처럼 '똑 떨어지는' 3박 4일의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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