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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비닐쯤이야

by 장돌뱅이. 2022. 7. 18.

언젠가 운동을 하다가 허리를 삐끗해서 끙끙거릴 때 아내가 파스를 붙여주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아내가 물었다.
"좀 어때?"
"한결 부드러워. 역시 당신이 붙여주니 약효가 직방이네."
아내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다시 한참이 지난 후 아내가 또 물었다.
"괜찮아?"
"물론! 근데 이상하게 파스 붙인 데가 좀 근지럽네."
나는 파스를 떼어 내서 살펴보다 크게 실소를 했다.
파스에 비닐이 그대로 붙어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느낌이 이상하더라."
아내는 처음엔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공세로 전환했다.
"뭘, 그래도 내가 붙여줘서 다 나았다며!"

아래 시를 읽다가 그 일이 떠올라 아내에게도 읽어주며 함께 웃었다.


맞벌이 20년은 쉴 새 없이 공사 중이다
아내는 날마다 남의 집 벽지를 골라주고
나는 밤마다 고장 난 기계와 뒹군다

죽은 기계 되살리고 돌아오는 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밥물 올리고 청소하고
만찬도 없는 밤을 맞으며
서로에게 달아주던 훈장!
큰 파스 한 장 반으로 갈라
삐끗한 허리마다 꼭꼭 붙여주면
안쓰러운 손바닥마다 아릿한 향내가 묻어난다
지친 벽마다 화사한 벽지로 단장해주는
측은지심을 발라주는 일이다

그 측은함이 뼛속 깊이 박히는 날도
깜빡, 비닐도 떼지 않은 채 발라주어도
이미 다 나은 듯한 얼굴로
마주 보며 곤히 잠든다

- 정원도, 「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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