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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제가 알아서 할게요

by 장돌뱅이. 2022. 7. 22.


자코탱 씨는 권위주의적인 가장이다. 그는 가족을 위한 자신의 헌신과 희생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가정의 법도에 시시콜콜히 신경썼다.  식구들은 가장의 기분이 상할까 봐 눈치를 살펴야 했다. 게다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의 욱하는 성미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늘 거북스러웠고, 그는 또 그런 분위기 때문에 짜증이 나곤 했다. 

주방의 식탁에 모여 앉은  식구들의 면면은 자코탱 씨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라한 모습의 아내, 벌이보다 씀씀이가 헤픈 두 딸, 조카 집에 얹혀사는 늙고 병든 고모, 그리고 공부는 지지리도 못하면서 늘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에 바쁜 열세 살의 막내아들 루시앵을 보며 자코탱 씨는 그들 때문에  '자기 재산이 도둑맞고 있다는 씁쓸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식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아버지의 주의를 끌지 않으려고 루시앵은 애를 썼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자코탱 씨의 주목을 받았다. 뭔가 찔리는 게 있음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일 학교 가는 녀석이 숙제를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반성하는 기색도 별로 없어 보였다. 평소 녀석 때문에 직장에서 우등생 아들을 둔 동료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터라 자코탱 씨는 분노했고 예의 그 길고 상투적인 훈계를 시작했다.

"(···) 이 게으름뱅이, 불한당, 멍청이 같은 녀석아! 그래 일주일 전에 내준 숙제를 아직도 안 했단 말이냐? 네가 조금이라도 인정이 있는 녀석이라면, 아니면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생각할 줄 아는 녀석이라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 게다. (···) 내가 얼마나 많이 걱정하고 불안해하는지 넌 몰라. 내가 일을 그만둘 나이가 되면 나를  먹여 살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 나는 아무리 처지가 궁해도 이웃사람에게 손을 빌리러 간 적이 없어. 내 부모 형제들의 도움을 받은 적도 없지. 네 할아버지는 내가 공부하도록 해주지 않으셨어. 네 나이 때 나는 벌써 남의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말 마소처럼 일을 했어. 겨울에는 동상이 걸렸고, 여름에는 땀에 전 셔츠가 등에 달라붙곤 했지. 그런데, 넌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어. 너무 착한 애비를 만난 덕이지. (···) "

그 와중에도 아들은 냅킨꽂이를 만지작거리며  아버지 말을 건성으로 듣는 듯했다. 마침내 자코탱 씨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숙제를 하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아들은  마지못해 공책을 펴고 숙제의 제목을 적었지만 그다음에는 한 글자도 더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막막함 끝에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

자코탱 씨는 답답함에 아예 자신이 직접 쓸테니 아들더러 그걸 베끼라고 했다.  숙제는 속담에 대해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코탱 씨도 머뭇거렸지만 잠시 생각이 정리되자 화려한 필치의 글을 거침없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생각과 말이 술술 풀려 나오고 서정성 넘치는 표현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마치 '꽃이 만발한 땅을 가진 영주처럼 부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부심과 열정이 담긴 숙제는 선생님으로부터 최하 점수를 받게 된다. 글이 줄곧 주제를 벗어나 있고 어색하게 멋을 부린 문장이 읽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것이 이유였다. 선생님은 심지어 잘못된 글쓰기의 본보기로 루시앵의 숙제에서 몇 대목을 골라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기까지 했다. 아무리 공부를 못했어도 그동안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굴욕이었다.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은근한 기대감으로 아버지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속담은 어떻게 됐니?"
그의 목소리에는 초조보다는 불안에 더 가까운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 순간 루시앵은 자기가 아버지에게 슬픔을 안겨줄 수도 있다고 느끼며, 대등한 인격체로 자유롭게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가엾은 아버지는 가장인 자기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랬는데 아들의 숙제를 도와주겠다고 나섬으로써 가장은 언제나 옳다는 원칙을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자초한 셈이었다. 이 전제적인 가장은 식구들 앞에서 체면을 잃게 될 것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 존경심마저 잃게 될 판국이었다. 그건 아버지에게 추락이나 다름없는 상황일 거였다. (···) 그 비극은 이미 엄청난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아버지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염려하는 루시앵이 마음에 연민의 정이 가득 찼다.

아들은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아버지의 얼굴은 환해졌고 의기양양한 눈길을 가족들에게 보냈다. 

루시앵은 눈을 내리깔고 기쁨으로 가슴이 뭉클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코탱 씨는 아들의 어깨를 툭 치며 상냥하게 말했다.
"어떠냐, 얘야. 어떤 과제에 착수할 때는 먼저 그 과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단다. 과제를 잘 이해했다면 이미 그것의 4분의 3 이상을 한 거나 다름없지. 내게 네 머릿속에 꼭 넣어주고 싶은  게 바로 그거란다. 잘 될 거야.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시간은 얼마든지 낼 생각이다. 그리고 앞으로 너의 국어 숙제는 언제나 우리 둘이서 같이 하도록 하자."

프랑스 작가 마르셀 에메의 단편 소설 「속담」의 내용이다. 
기특한 아들. 하지만 다음에도 아버지와 같이 숙제를 할 수 있을까?
아들이 '사려 깊은' 거짓말을 한 순간부터 식구들 위에 안하무인으로 군림해왔던 자코탱 씨의 권위와 세대는 종말에 다다른 것이다. 그의 완고한 자부심은 고루한 착각으로 점차 소멸되거나 철지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승부가 난 장기판의 알처럼 치워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간 채근하는 아버지의 눈길을 무덤덤히 피하며 던지는 아들의 시큰둥한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주체적인 독립선언이기 전에 아버지의 접근부터 완강히 차단하는, 견고하게 세운 말의 장벽.
그 '비극' 앞에서 안절부절 서성일 자코탱 씨에게서 60+라는 우리 세대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나이 먹는 과정은 대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법이지만 크게 억울할 일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앞에서 우리 부모 세대가 그러지 않았던가. 지나온 길을 '두 번 다시 걷고 싶지 않'더라도 후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지금은 벌써 전설이 된 먼 과거로부터
내 젊음의 초상이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지난날 태양의 밝음에서부터
무엇이 반짝이고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를

그때 내 앞에 비추어진 길은
나에게 많은 번민의 밤과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그 길을 이제 두 번 다시 걷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왔고
그 추억은 보배로운 것이었다
실패도 과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 헤르만 헤세,  「내 젊음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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