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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고우영 만화 읽기 1

by 장돌뱅이. 2022. 7. 20.

학창 시절 '짱짱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고우영, 아니 60년 대의 이름으론 추동성이 지은 만화 『짱구박사』에 나오는 캐릭터다.
자세한 기억엔 없지만 엉뚱하고 기발한 발명품을 만들어 사고를 치는 짱구박사의 아들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 사이에 별명이 될 만큼 추동성 만화의 인기가 높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만화를 무척 좋아했다.  『땡이와 영화감독』과 『땡이와 연필함대』를 지은 임창, 『홍길동』을 지은 신동우와 함께 추동성은 어린 시절 내가  제일 좋아했던 만화가다. 그외에 박기준, 박기정, 이정문, 길창덕, 이향원 등도 생각난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는 만화가 좋다. 『공포의 외인구단』의 이현세, 『타짜』의 허영만 등을  거쳐, 근래에는 강풀, 윤태호, 최규석의 만화를 챙겨본다. 일본 만화『심야식당』이나 『시마과장』, 『신의 물방울』도 보았다.


청소년기에 처음으로 접한 성인 만화의 시작은 단연 고우영이다. 스포츠 신문에 연재된 그의 만화를 매회 볼 수는 없었지만 학교 등굣길에 길거리 가판대에서 누군가 사온 신문을 반 아이들과 돌려 읽으며 대강의 스토리를 추정하곤 했다.  특히 남녀 관계에 초점을 맞춘 부분이 연재되는 날엔 반 아이들의 관심과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만화 속 걸찍한 성적 농담들에 낄낄거리곤 했다.


1.『임꺽정』
87년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월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어 말로만 듣던 홍명희의 장편 소설 『임꺽정』을 보기 전까지 내겐 고우영의 『임꺽정』이 최고였다. 조해일의 단편으로 쓴 임꺽정보다 더 좋았다. 드라마나 영화가 성공하려면 주연만큼이나 성공적인 조연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특히 주인공이 알려져 있는 인물일 경우  개성적인 조연들의  등장은 필수다. 그의 『임꺽정』에선 냉혈한 윤원빈과 좀도둑 벅걸이 그런 조연이다. 실존 인물인 서림도 그의 만화 속에서는 작가가 창작한 풍성한 이야기가 씌워지면서 더 실감 나는 인물이 되었다. 

『임꺽정』은 1972년 1월 1일부터 1년 2개월간 일간스포츠에 연재되었다고 한다. 1980년엔 단행본으로 나왔다. 그 시절 권력의 무지와 횡포를 고우영은 개정판 후기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한번 신문에 게재되었던 작품이라 해도 만화에 있어서 만큼은 얼토당토않은 잣대의 눈으로 다시 한번 더 검열을 통해야만 책으로 묶을 수 있는 이상한 장치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의 『임꺽정』은 그때 누더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중간을 뚝 잘라 들어내고, 화이트로 지워버리고, 경상도 사람이건 평안도 사람이건 등장인물들의 말풍선 속의 대사는 죄다 표준어로 고쳐 그 맛깔을 없애버리고 - 그 아무리 중요한 소재라도 검열 심의자의 눈에 거슬리면 가차 없이 들어내 버려 앞뒤 줄거리가 맞지 않는 팔푼 불구자의 임꺽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등장인물의 눈초리 하나, 말풍선  속 단어의 받침 하나라도 정성을 다해 다듬어 작품 전체의 기승전결, 그리고 하루하루의 연출에 심혈을 쏟아 만드는 작가에게는 그 무식하고 잔인한 칼질은 가히 살인적인 것으로 아픔을 주는 폭력이었습니다."

표준어(서울말)만을 강요하는 정책은 서울(도시) 우월주의와 획일적 군대식 사고가 낳은 결과물이다.
일례로 아래 만화 컷에서 사투리를 빼면 얼마나 밍밍하겠는가. 『임꺽정』만이 아니라 『일지매』에도 등장하는 수많은 평안도·함경도·경상도·전라도 사투리는 만화를 읽는 재미와 현실감을 배가 시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임꺽정』 중에서


2. 『일지매』
원래 일지매는 옛 중국 소설에 나오는 인물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이 일지매를 자처하는 도적이 있었다고 하나 실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만화 『일지매』는 전적으로 고우영의 창작물이다. 1975년 12월 17일부터 만 2년 동안 역시 일간스포츠에 연재되었다. 일지매는 TV 드라마로 소재로도 여러 번 방영되었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우리 문화를 알리기 위한 '한국의책 100권'에 포함되기도 했다.

『일지매』 역시 『임꺽정』처럼 작가의 독창적인 조연 캐릭터들이 빛난다. 버려진 어린 일지매를 구해준 걸치와 옆으로 걷는 청나라 스파이 왕횡보가 그들이다. 왕횡보는 후반부에 갈수록 개성이 없어지지만 걸치는 끝까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구원적 인간상을 잃지 않는다.

고우영의 만화 속 여성들은 하나 같이 남성에게 종속적이고 맹목적인 사랑 타령밖에 할 줄 모르는 존재로, 심지어는 단순한 성적 유희물로 다루어진다. 만화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 시대이고, 발표 매체가 상업적 대중 신문이라는 점과  만화가 그려진 시대의 사회적 인식 한계가 합쳐진 결과겠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 대목이다. 

가끔씩 등장하는 허세 가득한 양반에 대한 풍자도 재미있다.


3. 『홍길동』 
이 만화는 어린이용이다. 그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홍길동 이야기와 다르다.
홍길동의 출생부터가 다르고 중국으로 끌려가는 어린아이들을 구해낸다는 식의 결말도 그렇다.
황당무계 내지는 어색한 이름의 무술이 자주 등장한다. 어릴 적 읽었던 - 호피와 차돌바위, 백운도사와 텁석부리장군, 그리고 곱단이가 나오는 - 신동우의 『홍길동』이 더 좋게 기억된다. 그것도 지금 읽어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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