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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미안하지만 라면

by 장돌뱅이. 2022. 7. 15.


나는 학창 시절 이후 라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군대 시절까지는 좋아했다.
결혼한 이후는 아내가 해주는 밥을 더 좋아했다. 아내는 라면을 매우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 먹곤 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므로 내가 출근한 사이 혼자 집에 있을 때 그랬다.
그런 사실을 알 때면 나는 짐짓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몸에도 안 좋다는데 인스턴트 음식 되도록 먹지 마."
나의 '당위적' 충고에 반박을 할 수 없었을 아내는 알았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부엌일을 맡은 후 나는 가끔씩 라면을 식탁에 올린다.
옛날과 달리 '유기농·청정·영양 풍부' 라면이 출시된 것도 아니고,  나이든 아내의 몸이 이전보다 더 튼튼해졌을 리도 없다. 그보다는 특별히 먹을 게 마땅치 않고 왠지 게을러지는 날, 그저 한 끼를 간편하게 해결하는데 라면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 솔직한 이유다. 라면이 아내의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는, 남편으로서 나의 자상한(?) 사랑은 사실 그렇게 허약한 바탕 위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저지른 나의 허세가 켕겨서 아내에게 라면을 제안할 때면 목소리가 안으로 감겨든다.
"점심은 라면으로 할까?"
아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 옛날의 나처럼 '인스턴트니 건강이니'를 들먹이지 않는다. 
미소 속에 '당신도 직접 해보니 알게 되지?' 하는 은근한 다그침이나 비아냥이  담겨 있는 것도 같다.
아무튼 그렇게 다소의 비굴함을 감수하고 오늘 점심은 볶음라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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