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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미국 서남부 지역2 - SAGUARO 국립공원

by 장돌뱅이. 2012. 5. 16.

어릴 적 본 서부 영화에서 말을 탄 총잡이들이 지나는 길목에는 흔히 큰 기둥 같은
선인장이 우뚝우뚝 서 있곤 했다.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그 인상적인 기둥 선인장의
이름이 SAGUARO이다.


*위 사진 : 작년 가을 애리조나 PHOENIX를 지나며 본 SAGUARO 선인장.
                  이번 여행의 주요 동기가 되었다.

애리조나는 SAGUARO의 원산지이고 그중에서도 투싼에는 SAUARO 선인장이 밀집되어
있는 국립공원이 있다. 투싼에는 사람보다 SAGUARO가 많다고 하니 SAGUARO NATIONAL
PARK를 투싼에서의 첫 방문지롤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와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볼거리를 묻자 MARYLAND에서 온 미국인 부부는
ARIZONA-SONORAN DESERT MUSEUM을, 숙소의 주인 패티 할머니는 옛 영화 촬영소인
OLD TUCSON STUDIOS를 각각 추천해주었다.

영화 촬영소를 말할 때 패티 할머니는 여러 유명 서부 영화를 촬영한 곳이고
그 무대에서는 지금도 배우들이 직접 나와 총격전을 벌이기도 한다면서
직접 총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실감나게 연기로 보여주었다.
(그녀의 비명소리와 고통스런 얼굴 표정을 직접 보여주지 못해 유감이다.)
그 이외에 아내와 내가 MISSION SAN XAVIER DEL BEC이라는
성당 하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니 하루 일정이 저절로 정해진 셈이었다. 

SAGUARO 국립공원은 동쪽과 서쪽의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SAGUARO EAST는 RINCON MOUNTAIN에 있고, WEST는 TUCSON MOUNTAIN에 있다.
우리는 서쪽으로 향했다. 한 곳만 갈 수 밖에 없다면 서쪽 공원의 SAGUARO가 더 보기
좋다고들 하고 숙소에서 추천 받은 다른 두 곳의 볼거리도 서쪽에 있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투싼에서 이삼십 분 차를 타고 서쪽 외곽으로 벗어나니 아직 공원지역으로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산과 들의 눈에 보이는 곳마다 SAGUARO가 가득하다. 산등성이에서 평지에 이르기까지 마치 창을
든 무수한 군사들이 온통 점령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지터 센터를 지나 우리는 서쪽 공원의 전형적인 루트인 BAJADA LOOP DRIVE를 따라 차를
몰았다. 길은 이내 비포장으로 바뀌었지만 잘 다듬어진 평평한 길이라 승차감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길 양 쪽으로 무수한 SAGUARO들이 서 있다.
길고 짧은 트레일이 이 길에서 이어진다. 차를 세우고 그 중에 한 곳을 택해 트레킹에 나섰다.
VALLEY VIEW OVERLOOK TRAIL. 천천히 걸어서 왕복 한 시간이면 충분한 코스였다.

아침 기온은 낮았지만 맑은 기운이 베인 상쾌할 정도의 차가움이어서 걷기에 더 없이 좋았다.
아내와 나만을 바라보는 듯한 SAGUARO의 사열을 받으며 걸어가는 길. 가까이서 본
SAGUARO는 거리를 두고 볼 때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거대한 몸집을 지녔지만 순박하고
착한 심성을 지닌 털털한 거인 같은 인상을 주었다. 온 몸에 돋아난 날카로운 가시들이 오히려
노란 털처럼 부드럽게 보였다.

SAUARO 씨앗의 크기는 뜻밖에 매우 작고 자라는 속도도 무척 더디다.
일년 생 묘목의 크기가 겨우 4분의 1인치이며 30년이 되어야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인간의 나이로 치면 환갑 진갑이 다 지난 75년이 되어야 비로소 첫 가지를 뻗을 수 있다고
한다. 다 자란 SAGUARO는 최고 15미터 정도까지 자라며 무게도 7-8톤에 달한다.
수명은 175년에서 200년 사이로 인간에 비해서는 두세 배나 오래 사는 장수 식물이다.

자연적인 수명을 다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곳곳에 시커멓게 죽어가는 SGUARO의 잔해들이 눈에 띄었다. 그 곁에선 또 어린 선인장들이
푸르게 자라고 있다. 이 인적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이루어지고 있는 생명의 순환.
개체는 소멸하지만 그 소멸로 종족은 번성해가는 것이 엄정한 자연의 법칙이다.
개체의 그 유한성이 저마다의 삶을 절실하게 하고 경건하게 한다.
사랑. 하늘과 땅과 인간에 대한 사랑.
피할 수 없는 지상에서의 어느 마지막 순간을 문득 자각하며
그것만이 우리가 생에 남길 유일한 발자취임을,
그렇게 살아오지 못한 내 자신을 부끄럽게 떠올려보았다.

트레일의 끝은 드넓은 평지의 사막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팍팍하게 메마른 땅에는 키 작은 사막의 관목들이 자라고 있었고 그사이사이에
서 있는 어린 선인장들이 서 있어 사막의 황량함을 감추고 있었다.
힘도 들지 않고 개운한 트레킹이었다.
아침 내내 우중충하게 흐려있던 날씨가 먼 하늘부터 개어왔다.


*위 사진 : ARIZONA-SONORAN DESERT MUSEUM

ARIZONA-SONORAN DESERT MUSEUM은 동물원이었다.
딸아이가 커버린 뒤부터 아내와 나에게 인상적인 동물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SAGUARO 공원에서 더 시간을 보낼 것을 하며 잠깐 후회도 해보았다.
산책을 하는 기분으로 아내와 길을 따라 걸어보고 나와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러나 며칠 뒤 샌디에고로 돌아가는 길에 미세쓰 패티의 숙소인 EL PRESIDO에서
이곳을 추천해 준 MARYLAND에서 온 부부를 다시 만났을 때, 자신들이 추천해 준
MUSEUM이 어땠느냐는 질문에는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IT WAS GREAT!"라고 해주었다.

OLD TUCSON STUDIO도 그냥 그랬다.
죤웨인과 버트랑카스터, 커크더글러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의 쟁쟁한 옛 헐리우드의
스타들이 이곳에서 서부극을 찍었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의 영화 세트장이 그렇듯
‘가짜’ 건축물들은 역시 영화 속에 있을 때라야 살아 있어 보일 뿐이었다.

패티 할머니가 말해 주었던, 19세기 후반 이곳을 주름 잡았던 무법자 ‘빌리 더 키드’가
나오는 총격전의 공연이 마을 한 복판 건물에서 있었다. 역시 긴장감보다는 한 편의 서커스를
보는 기분이었지만 그런대로 볼만 하긴 했다.

아내와 나에게는 무엇보다 1939년이라는 스투디오의 건립 시기가 부럽게 다가왔다.
그 해에 우리의 역사가 어떤 시기를 보냈던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랬다.
헐리우드는 오래 전부터 거대한 영화 자본의 대명사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상징어가 되었다.
상업적이냐 예술적이니냐 하는 논란은 늘 있어왔지만 그 무엇이든, 그리고 어떤 의미로든
헐리우드는 미국의 군사력만큼이나 강력한 미국의 힘이다.
영화만큼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선 장르가 있을까?
우리 모두 얼마쯤은 ‘헐리우드 키드’였고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위 사진 : MISSION SAN XAVIER DEL BAC

계획대로 마지막 일정으로  MISSION SAN XAVIER DEL BAC에 들렸다.
카톨릭이란 이방인들의 종교가 인디언들에게 복음이 되기까지의 사연.
아는 바는 없지만 그 속에 우리가 알고 있는 북미 인디언이 겪어야 했던
애잔한 역사의 시초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18세기 후반에 지어졌다는 이 성당은 외벽의 흰색이 눈부셨다.
아내와 성당 안으로 들어가 다리를 쉴 겸 의자에 앉아보았다.
최근에 카톨릭에 입문한 병아리 신자지만 아내는 진지하다.
성호를 긋고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따라하려던 나는 왠지 머쓱해진다. 아직 좀 뭔가 어색하다.
그냥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해묵은 벽화와 조형물로 현란한 연단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감사합니다.”
내가 별 할 말이 없을 때 마음속으로 올리는 기도다.
숨소리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것을 아시는 분에게 중언부언할 께 무엇 있느냐고
억지 위안을 삼아보면서.

성당 앞 언덕 꼭대기에 흰 십자가가 있었다.
그곳에 올라보니 쇄잔해진 저녁 햇빛 속에 멀리 투싼시가 건너다 보였다.
겨우 하룻밤을 자고 오늘 저녁만 지나면 떠날 곳인데 우리 동네라는 생각에
바라보는 마음이 오붓해진다. 머물렀다는 것은 그런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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