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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아버지의 해방일지』

by 장돌뱅이. 2022. 10. 20.

정지아의 최근작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가 1989년 실천문학 봄호에 발표했던  『빨치산의 딸』의 연작이나 후일담이라고 해도 좋을 소설이다. 2003년 발표된 중편 「행복」도 마찬가지다.  세 가지 소설 모두 빨치산의 전력을 지닌 부모님의 삶과 그로 인해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딸 사이의 크고 작은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담고 있다. 작가는 "적이라고 배웠던 부모님을 이해해가는 과정이 나의 성장 과정이었다"고 밝혔다. 

80년대였기에 가능했고 80년대다운(?) 소설이었던 『빨치산의 딸』에는 치열했던 부모의 젊은 시절이 담겨 있다.「행복」은 젊은 시절의 꿈을 끌어안고 유배지의 혁명가처럼 늙어가는, 아름답기는 했으나  생기 없이 공허해 보이기도 하는 부모의 노년을, 그리고『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모여든 조문객들을 통하여 퍼즐 맞추듯 드러나는 아버지의 삶에 대한 반추를 그렸다. 

나는 빨치산의 딸이다. 아버지는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이었고 어머니는 남부군 정치부 지도원을 지냈다. 1952년 (···)  조직사업을 목표로 (···) 자수를 시도했던 아버지는 (···) 일 년 뒤 도당과 접선하다 붙잡혔다. 순천지법에서는 사형을 언도받고 광주고법에서 무기로 확정되었다.
1948년 여순반란 후 14연대와 함께 입산한 어머니는 (···) 1954년 4월 환자트에서 생포된 후 8년 형을 선고받고 전주교도소에서 5년을 복역했다. 아버지가 잠시 병보석으로 나왔을 때 두 분은 서로 만났고 결혼해서 나를 낳았다. 1965년 6월이었다. 두 분이 내게 준 이름은 지아였다. 지혜 지(智), 나 아(我), 지리산의 지(智) 자였고 백아산의 아(我) 자였다. 지리산은 어머니의 무대였고 백아산은 아버지의 무대였다.
자의든 타의든 나는 우리 격동의 역사를 이름으로 내걸고 살아온 셈이다. 형을 마쳤다고 해서 부모님의 삶이 자유로와진 것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이나 사회안전법은 거주이전의 자유조차 제한했다. (···) 출소 이후 부모님의 삶은 굴욕과 절망의 나날이었다. 미래의 단 하나 통로였던 자식까지도 반공교육에 물들어 부모를 적으로 돌렸다. 국가보안법이나 사회안전법은 부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내 자신의 문제였다. 판검사가 되겠다는 내 꿈은 연좌제 때문에 일찌감치 버려야 했고 체제 유지에 광분한 자들은 어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적이라고 배웠던 부모님을 이해해가는 과정이 바로 나의 성장의 과정이었다. 대통령이나 판검사가 되겠다는 꿈이 꺾인 후로 나는 글을 쓰려했다. 부모가 빨갱이였다는 이유 때문에 미래를 차압당한 분노로 시작됐던 글쓰기 행위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명백히 가르쳐주었다.
- 『빨치산의 딸』 중에서 -

 출소 후 사회주의가 금기시된 남한 땅에 살면서도 부모님의 생각과 일상은 옛 시절에 붙박여 있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마저 금지되어 있던 시절에는 이불속에서라도 끊임없이 그 시절로 돌아갔다'. 모처럼 딸 부부와 생일 기념 여행을 떠나와서도 가족들과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나누는 대신에 오직 뉴스에 몰두해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딸은 섬뜩한 느낌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뉴스는 부모님이 잠든 사이에도 세상은 별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전할 뿐'인데도 말이다. 

부모님의 삶을 지리산에 가둔 것은 남한의 독재체재가 아니라 어쩌면 당신들이 그토록 신뢰했던 역사라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비정한 괴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사를 신뢰하는, 청춘의 꿈을 신뢰하는 부모님의 순정 또한 나는 비정한 역사만큼이나 당혹스러웠다. (···) 부모님에게 소망이란 애초에 도달 불가능한 유토피아이며, 그들의 인생이란 배신과 실패마저 제 심장과 동맥으로 삼아 앞으로든 뒤로든 뛰든 기든 여하튼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유토피아를 향한 멈출 수 없는 마라톤 같은 게 아니었을까.
- 「행복」 중에서 -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너무 진지해서 유머였던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삶을 마감하는데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생면부지의 방물장수를 단지 사정이 딱하다는 이유로 집에까지 데려와 하룻밤을 재우려고 하거나 보증을 섰다가 큰 빚을 떠안는 식으로 평생을 '누가 등쳐먹는 호구가 아니라 자원한 호구'로 살아왔다. 어머니는 낯선 손님을 마뜩잖아하고 빚도망을 한 사람에게 원망을 퍼붓는다. 아버지의 진지가 유머로 변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 어머니에게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게 혁명가의 원칙을 일갈할 때이다. 그럴 때마다 희한하게도 사그라드는 어머니의 불만과 원망도 유머이기는 마찬가지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숨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시끄러 오죽허먼 밤도방을 쳤겄어! 그 사람이라고 호의호식허고 삼시로 그 돈 안 갚겄는가. 오죽흐먼 친정에 연락도 못허고 죽은디끼 살겄어!"

아버지의 민중인 방물장수가 그날 밤 '집에  남긴 것은 벼룩이고 대신 가져간 것은 서까래에 매달아 놓은 마늘 반 접이 었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아했다. '오죽허먼 그깟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을 뿐이다. 배신당했다고 분해하기는커녕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민중이 마늘 반접 따위 훔치지 않고도 배곯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장례식장에 조문을 오는 사람은 다양했다. 가깝거나 멀리 지내던 일가친척, 동창, 지역 주민, 옛 동지, 평생을 군인·교련 선생·조선일보 애독자로 살아온 사람,  가톨릭농민회, 민노당원, 아버지와 담배를 나누어 피웠던 십 대 소녀와 그의 어머니인 이주여성, 심지어 잘 죽었다고 침을 뱉는 사람까지 있었다. 원수처럼 외면하고 지내던 동생도 끝내는 조문을 왔다.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 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 년뿐이었다. 고작 사 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옥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 아버지는 더 오랜 세월을 구례에서 구례 사람으로, 구례 사람의 이웃으로 살았다. 친인척이 구례에 있고, 칠십년지기 친구들이 구례에 있다. 아버지의 뿌리는 산이 아니다. 아버지의 신념은 그 뿌리에서 뻗어나간 기둥이었을 뿐이다. 기둥이 잘려도 나무는 산다. 다른 가지가 뻗어 나와 새순이 돋고 새 기둥이 된다.

새는 자유롭게 허공을 날을 수는 있지만 허공에 집을 지을 수는 없다. 삶은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낯선 누군가와  관계하는 그물망 속으로 끊임없이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혁명가이고 빨치산의 동지일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그 이전에(그 이후에도) 자식이고 형제이고 남자이고 연인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이고 친구이고 이웃인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작가는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로 아버지를 다시 인식하면서 아버지의 삶과 화해를 한다. 한 사람의 삶은 그런 모든 기억의 총체일 것이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지배 권력의  언어를 빌려 사람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오직 한 가지로 단순화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다. 얼마 전 한 인사가 전직 대통령을 '김일성주의자'라고 단언했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 그 말은 모든 논의와 이해를 정지시킬 수 있고, 한 사람의 삶을 비틀어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닌 지배 권력의 언어였다. 피난 열차 안에서 오직 좌석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으로 앉아 있는 사람을 지목하여 빨갱이라고 외쳤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아직 그런  말들이 횡행하는, 아니 그런 낡은 언어로 자신의 숨은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시대착오적인 무리들이 여전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걸핏하면 '좌파 '니 '북에 가서 살라'니 하는 폭언으로 모든 화해와 공존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려 든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는 사람을 잡아다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다리가 나오면 다리를 잘라서 죽이고 다리가 짧으면  늘여서 죽였다고 한다. 신화 속 괴물처럼 오직 자신만이 기준이고 중심임을 내세울 때 생겨나는 야만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결말은 따뜻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직 개인적인 화해일 뿐이지만 세상도 너무 늦기 전에 현명해지길 바랄 뿐이다. 오목조목하고 정겨운 전라도 사투리를 해석하는(?) 재미도 꼬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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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책모임 "동네북"의  10월 선정도서라 읽게 되었다.
*별도 표기를 하지 않은 파란색 부분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카카오사태로 티스토리의 기능이 온전치 않았다. 컴퓨터를 켜도 모바일버젼으로 나왔다. 글을 어디서 올려야 하는지 알 수없어 포기를 했다가 다른 사람들이 올리는 걸 보고 나도 여기저기 쑤셔보았다. 우회도로(?)를 힘들게 찾아서 드디어  글을 올리고나니 그제서야  pc용 화면도 정상화 되었다. 비상 상황에 대한 대응이 이렇게 허술한 것일까 의문과 불만이 든다. 카카오가 자성의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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