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사이 비가 내려 길이 젖어 있었다. 바람이 불고 기온이 떨어졌지만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아내가 잠에서 깰 때까지 강풀의 만화 『마녀』를 읽었다. 모든 사랑은 불안하고 위험하고 때론 치명적이다. 그래도 사랑은 그런 모든 것에 맞서게 한다. 아니 끌어안게 한다.
"누구나 다 그래. 사랑은 다 불안해. 우리는 조금 다를 뿐이야."
사랑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무의미해지는 우연이고 필연이고 운명이다. 그런 이야기를 긴장과 감동 속에 풀어가는 작가의 솜씨가 조금 늦게 잠에서 깨어나 영문을 모르는 아내를 토닥거려주게 했다.
며칠 전 제주 시내 아베베 빵집에서 사와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빵과 미숫가루로 아침을 했다.
오늘 점심은 '음식 복습' 두 번째로 산방식당의 국수다. 지난번과 같이 아내는 비빔국수를 나는 고기국수를 먹었다. 굳이 평가를 하자면 비빔밀면의 맛이 더 낫지만 고기국수는 추운 날씨에 따끈한 국물도 생각나고 자주 접할 수 없는 음식이라 주문을 했다.
식사를 하고 함덕해변으로 나갔다. 추위와 바람 때문에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다.
옷깃을 여미며 사람이 없어 황량한 분위기의 해변을 걷는 맛도 나쁘진 않았다.
김기량순교기념관에도 들렸다. 냉담자인 아내와 나지만 그래도 세례를 받은 신자로서 같은 함덕에 있는 순교자 기념관은 한번 들러주어야 할 것 같았다.
김기량은 함덕 출신으로 소규모 무역상이었다고 한다. 그는 1857년 초 제주 근해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 광동성 해역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었다. 이후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인도된 그는 그곳에서 제주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귀국 후 복음을 전파하다가 체포되어 5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무역상과 풍랑과 표류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복음과 만나 삶을 바꾼 그를 보며 운명이라거나 혹은 신의 뜻 같은 삶의 수수께끼들을 잠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와 안소니퀸 주연의 오래된 영화 『25시』를 보았다. 전쟁과 편견과 이데올로기의 광풍에 영문도 모른 채 휘말린 한 순박한 농부의 삶을 그린 영화였다. 70년대 학창 시절 친구와 이영화를 보고 난 후 비로소 원작인 게오르규의 소설 『25시』를 읽었다. 소설엔 영화보다 더 많고 깊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제 보잘 것 없는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드리자. 자신의 집권을 남용하여 국가라는 비인간적 압박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자들, 사람을 심문하고 감독하는 자들, 허가를 해주고 금지령을 내리는 자들, 이 모두를 위하여 기도드리자. 문자와 숫자를 살과 피보다도 진실하고 생명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드리자.
-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중에서 -
25시는 최후의 시간인 24시 이후에도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지 않고, 모든 구원이 끝나버린 듯한 밤이 계속되는 절망의 시간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는 몇 시를 지나고 있는가? 학창 시절 책을 읽으며 자문했던 물음을 다시금 지금도 되물어 보게 되는 시절이다.
저녁엔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귤된장무침을 만들었다. 돼지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내가 제주도에서는 돼지구이와 돼지고기를 넣은 찌개를 마치 제주도 체질(?) 임을 과시라도 하는 양 잘 먹는다.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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