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게으른 사람이다. 진득이 무언가에 집중하는 일은 책 읽기와 블로그에 잡문 쓰기, 요리뿐이고 대체적으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며 지낸다. 묵혀 두었다가 안 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한다. 초등학교 다닐 때 여름방학 숙제는 늘 개학을 앞둔 하루 전날에야 수선을 피우며 하곤 했다.
파김치를 좋아하지만 파를 다듬는 일엔 좀이 쑤신다. 아내에게 "내년부턴 파김치 사 먹자"라고 말하곤 한다.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면서도 아내가 햇마늘 다듬어 일 년 먹을 걸 만들어두자고 할 때는 끙끙거리며 마지못해 한다. 서울 근교에서 농사를 짓는 누님이 모과를 보내주어 모과청을 만들면서는 "왜 이런 걸 보내줘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고 구시렁거렸다. 매실청을 만들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지인이 유자를 한 상자 보내 주었다. 고맙다고 통화를 하면서 나는 "기왕이면 청으로 만들어서 보내주시지" 하고 농담 섞인 속내를 덧붙였다.
"눈이 게으른 거야. 잠깐이면 돼."
아내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자주 쓰시던 말투를 흉내 냈다. 결코 잠깐일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는 유자 상자를 싱크대에 올려달라고 하더니 내가 외출한 사이에 깨끗이 씻어 체에 바쳐 놓았다.
"유자는 어떻게 씻어?"
게으른 나의 천성과는 별도로 아내로부터 부엌일을 '전수'받는 중이라 알아 두어야 했다.
"베이킹소다로 문질러 씻어 물에 담가두었다가 물로 여러 번 씻어낸 다음, 식초물에 오래 담그고 다시 물로 여러 번 씻어 냈어. 유자는 껍질을 사용해야 해서 깨끗이 씻어야 해."
아내의 설명을 들으며 내가 씻게 되면 식초물에만 담가 두었다가 씻지 않을까 생각했다.
껍질에 물기가 빠진 후에 본격적으로 아내와 함께 유자청 만들기에 들어갔다.
아내의 허리가 좋아져서 식탁에 앉을 수 있는 것이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아내의 지시를 받아가며 내가 온전히 혼자서 해야 할 작업이었다.
아내는 일을 하다가 허리가 묵직해져 오면 침대에 누웠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작업을 했다.
먼저 유자의 표면을 다듬고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속에 든 씨를 일일이 포크를 사용해서 빼냈다.
그리고 유자의 속과 껍질을 분리했다.
속 부분은 믹서기로 갈아서 걸쭉한 국물을 만들었다.
유지 껍질 속 흰색 부분은 가능한 많이 숟가락으로 파냈다.
손질한 껍질은 가늘게 채를 썰었다.
채를 썬 껍질과 믹서기에 갈은 속을 합치고 일정 비율로 설탕을 넣어 버무렸다.
그리고 하루 전에 사다가 씻어 말려놓은 병에 담았다. 아내는 주위에 나누어줄 사람들을 꼽아 놓았다.
한나절을 투자한 노동에 비해 병에 나누어 담고 보니 결과물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룻밤을 베란다에서 숙성시킨 후에 냉장고에 넣었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무엇이건 누군가의 노동이 있어야 생겨난다.
누군가 청소기를 밀어야 먼지가 없어지고 철마다 옷장 속을 정리해야 손쉽게 제철 옷을 입을 수 있다. 누군가 농사를 지어야 쌀이 나오고 누군가 그걸 실어 날라야 살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 밥을 지어야 먹을 수 있다. 화물연대 파업으로 제한적인 양만 판다는 주유소의 안내판을 보며 세상이 유기적인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그 모든 연결고리마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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