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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샌디에고 걷기9 - SAN ONOFRE STATE BEACH

by 장돌뱅이. 2012. 5. 23.

가까이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잊고 지낼 때가 많다.

서울에 살면서 북한산이 얼마나 우람하고 당당한지
출렁이는 한강물이 얼마나 유장하고 넉넉한지
경복궁 근정전의 지붕선이 얼마나 유연하고 자연스러운지 등등에 대하여.

서울에서는 너무 흔하고 가까운 것들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는 늘 먼 곳에 마음을 두고 지낸다.
그러나 낯선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작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은 흔하고 익숙해서
편안한 것들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직원 가족들과 캠핑을 계획하면서  
샌디에고 인근 바닷가에 줄지어 있는 캠핑장을 인터넷에서 뒤져 보았다.
바닷가를 따라 캠핑장 또한 무수히 많으니 한두 가족의 캠핑 쯤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대부분의 캠핑장이 만원이었다.
겨울이 오기전까지는 거의 모든 캠핑사이트의 주말 예약이 완료되어 있었다.
10월 중순까지는 주중에도 빈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심지어 내년 여름의 예약이 된 곳도 있었다.

"아니, 샌디에고 바다에 뭐 볼게 있다구......"

나는 말도 안되는 불평을 해대며
"RESERVED"란 뜻의 'R'자가 가득한 캠핑사이트의 현황을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태평양에 접한 캘리포니아의 해안선은 길고 길지만
대륙의 전체 넓이에 비하면 그다지 긴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환상적인 여름 날씨와 맞물린 샌디에고의 바다는
미국 전역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만 내가 아직 미국인들의 생활 방식을 습득하지 못한 '초짜'  이방인이었을 뿐이다.

'뭐 볼 게 있느냐'는 불만은 얼마나 건방지고 오만한 발상인가.
흔하고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조건이 여행지로서 어떤 곳에 대한
평가에 더 큰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흔한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일년 전부터 예약을 해두어야 할만큼
절실한 가치를 지닌 것이 될 수도 있다.
여행이건 삶이건 우리는 가끔씩 등잔 밑을 돌아보아야 한다.

SAN ONOFRE STATE BEACH CAMPING SITE.
그런 상황에서 운 좋게 예약을 할 수 있었던 곳이다.
누군가 갑자기 예약을 취소했는지 며칠을 두고 보는 사이에
어느 순간에 'R'이란 글자가 'AVAILABLE'을 뜻하는 'A'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클릭을 하고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집에서 엘에이 쪽을 향해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SAN ONOFRE는 원래 내가 마음 먹었던 곳이 아니었다.
주변에 더 좋은 시설과 전망의 캠핑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SAN ONOFRE는 말만 비치캠프장이지 해변으로부터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밤 새도록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것저것을 가릴 개재가 아니었다.

엘에이에 있는 직원까지 부르면서 계획보다 일이 커졌다.
촉박한 시일로 일을 나눌 수도 없어 실제 준비는 아내가 도맡았다.

30년 가까히 묵은 나의 쟈칼 텐트와 비슷한 연식의 직원 코오롱 텐트를
연이어 세우고 나니 제법 옛집처럼 아늑해 보이는 것이  캠핑 분위기가 났다.
음식을 나누고 불을 지폈다. 밤이 깊을수록 선명해지는 모닥불빛 속에
우리는 저마다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던져넣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해변으로 향하는 트레일을 따라 걸었다.
왕복 두 시간의 제법 먼 길이었다. 경치도 그다지 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행에 나선 어린 아이조차도 아무런 투정 없이 걸을 만큼
수더분한 산책길이었다. 해변에는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흰 모래.
눈부신 햇살.
가없는 바다.
푸른 하늘.
흘러가는 먼 구름.

그 흔한 풍경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바다 가까이 살면서도 미욱하게도 매번 바닷가에 서고나서야 다시 깨닫곤 한다.

엘에이에서 먼 길을 내려온 아이는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뿐이라는 사실에 무척 아쉬워했다.
바닷가에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어른들 역시 같은 마음으로 짐을 꾸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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