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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그 기억들이

by 장돌뱅이. 2023. 6. 11.

1986년 10월의 건대항쟁을 기리는 "10.28 건대항쟁기림상"

자욱한 최루에 맞서는
뜨거운 거리였다

가투를 치르다 다리를 다쳐
바지에 핏자국 배었다
골목길 달리는데
앞에서 검문 중이었다

누군가 옆에 와서 팔짱을 꼈다
편안하게 가요, 부부인 척하고
임신 중인 불룩한 배가 눈에 들어왔다
그이가 피 묻은 바지 위로 몸을 붙였다

낯선 친절의 그늘에 숨어
골목을 나왔다
조심하세요
치마에 붉은 얼룩이 눈에 들어왔고
인사도 못한 채 거리로 뛰어들었다

그 아득한 길을 떠나와서도 
검문은 길목마다 나를 기다렸다

막다른 길에서 멈칫거릴 때
편안하게 가요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데
내 피 묻은 바지를 가리던
붉은 얼룩 치맛자락이 보인다

- 이은래, 「늦게나마 고마웠습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시위대가 어디선가 달려오는 무장 경찰을 피해 파편처럼 시장으로 뛰어들면 그들의 등을 감싸 가게 안쪽으로 서둘러 숨겨주던 상인들. 그리고 자리를 바꿔 가며 마치 요즈음의 플래시몹을 하듯 다시 모여들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던 87년 6월의 밤.

그 기억들이 무력감과 냉소와 원망이 깊은 이 시간을 넘어 희망을 벼리는 불쏘시개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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