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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법 없이 살기 위해서

by 장돌뱅이. 2023. 6. 13.

'가네코 텟페이'는 면접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만원 전철을 탔다가 여학생을 성추행한 현행범으로 오해를 받아 체포된다. 경찰과 검찰은 텟페이의 억울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수사로 자신들의 논리를 관철시켜 나간다. 국선변호인조차도 잘못을 인정하고 합의를 하면 벌금형으로 마무리될 수 있다며 회유를 한다.

합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텟페이는 일관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유죄 선고 확률 99.9%'라는 '불리한' 재판을 감수한다. 결국 법원의 판단은 유죄였다.
판사의 선고를 보며 텟페이는 마음속으로 외친다.
"최소한 나는,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유죄가 되었다.
그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 일본 영화. 2008년 한국 개봉 뒤 올봄에 재개봉)

대학생 김현수는 우연히 만난 여성과 하룻밤을 지낸 뒤 살인범으로 몰린다.
그는 결백하지만 입증할 수 없다. 오히려 당황해서 저지른 소소한 실수들로 더욱 불리해진다. 경찰과 검찰은 전체적인 진실 파악보다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황만 발췌하여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김현수와 가족들의 삶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진실을 밝히는 명쾌한 해법은 변호사 신중한을 괴롭히는 아토피에 대한 그것처럼 쉽게 나오지 않는다. 유죄와 무죄가 번복되지만 경찰과 검찰이 법의 이름으로 자행한 잘못은 또 다른 거짓으로 포장되고 피폐해진 피해자의 삶은 쉽게 복원될 것 같지 않다.

(<<어느 날>> : 2021년 쿠팡플레이 공개)

법이라는 여과 장치.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 아닌 진실을 걸러내는 장치로 오용되는 사례를 자주 보아왔다.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세워놓고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한 수사와 기소와 재판은, 무고한 이들에게는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고 통과해야 하는 '합법적 폭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특히 정치라는 효소가 더해지면 사안은 실제보다 쉽게 부풀려지고, 법과 그 법의 집행자들은 권한을 자의적이고 과도하게 행사하곤 했다. 법이 진실과 인권 대신에 권력을 대변할 때, 그 무소불위의 힘을 통제할 어떤 제도적 장치를 가지고 있지 못할 때,  그 속에선 누구도 '법 없이 살 수 있는' 자신의 평온한 일상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박완서 씨의 단편 소설 「조그만 체험기」는 전기용품상을 하는 무고한 남편이 사기 사건에 연루되자 검찰과 재판에 따라다니며 옥바라지를 한 아내의 경험담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 아내의 깨달음이 위 영화와 드라마에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겹쳐진다.

어느 날이고 자유를 유보하고 있는 상황이 좋아져서 우리 앞에 자유의 성찬이 차려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전 같으면 아마 가장 화려한고 볼품 있는 자유의 순서로 탐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하고많은 자유가 아무리 번쩍거려도 우선 간장 종지처럼 작고 소박한 자유, 억울하지 않을 자유부터 골라잡고 볼 것 같다.
억울한 느낌은 고통스럽고 고약한 깐으론 거기 동반한 비명이 너무 없다. 그게 워낙 허약하고 참을성 많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일 게다. 자기나 자기 가족에 대한 편애나 근시안에서 우러나오는 엄살로서의 억울함에는 그래도 소리가 있지만,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숙명처럼 보장된 진짜 억울함에는 더군다나 소리가 없다. 다만 안으로 안으로 삼킨 비명과 탄식이 고운 피부에 검버섯이 되어 피어나기도 하고, 독한 한숨으로 피어나기도 하고, 마지막엔 원한이 되어 공기 중에 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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