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밥상』의 원제는 "The Ethics of What we eat"이다."먹는 것(행위)의 윤리학" 쯤 되겠다.
윤리는 고립이 아닌 관계의 산물이다. 식품의 구매와 소비는 그 이전의 생산과 유통의 과정과 유기적으로 얽힌 사회 구성망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이니 거기에도 고려해야 할 어떤 '게임의 법칙'이 존재할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음식 선택이 우리 아닌 타자(他者)에 미치는 영향'을 중점을 두어 책을 썼다고 집필 의도를 밝혔다. 피터싱어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생명윤리'를 가르치는 학자이며, 짐메이슨은 농부이며 변호사이다.
『죽음의 밥상』에서 우선 강조하는 것은 이른바 '동물권'이다. 인간의 식재료 이전에 감정과 감각을 지닌 동물이라는 생명체로서, 태어나고 살다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녀야(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위와 권리를 말한다. 인간의 문명이 과학과 인권 신장(伸張)의 역사였다면 동물에게는 동물권 축소와 왜곡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겠다. 농경시대의 단순한 가축화를 넘어 이제는 '산업'의 이름으로 상품이 된 동물들은 이러한 권리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채 단순히 '고깃덩어리'로 생산되고 유통되고 밥상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대규모의 공장형 밀집 사육에서 나온다. 그속에서 키우는 닭과 돼지, 소와 어류 등 가축들의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한마디로 가축 자체와 주변 환경의 오염, 그리고 생명의 경시와 학대이다. 책은 동물에 대한 이런 부당한 강요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인간의 삶에도 위협을 준다고 말한다.
<닭>
우선 닭고기에 대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미국 '전국닭고기 협회'의 <<동물복지지침>>에는 '평균 시장 거래 체중'을 가진 닭 한 마리는 A4 복사용지 크기의 몸을 움직일 공간을 주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크기는 닭이 어릴 때는 괜찮지만 자라면서 조밀해져 날개를 펼칠 수 없게 된다. 스트레스를 못 이긴 닭들은 서로를 쪼아대기 마련이다. 도망칠 공간도 없으니 약한 닭들에겐 치명적이다. 업체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닭부리 끝을 불로 달군 칼로 잘라버린다. 마취제는 쓰지 않는다.
닭들에겐 항생제와 성장촉진체가 투여된다. 1950년보다 3배나 빠른 속도로 성장시켜 6주 후에 도살하기 위해서다. 반복된 항생제 투여는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 생성을 돕게 된다. (그래서 항생제의 '약발'이 소용없게 되는 6주가 도살 시점이 된다는 말도 있다.) 근육과 지방의 빠른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90%의 닭이 다리를 절거나 뼈질환으로 고통을 받는다.
닭똥더미에서 나오는 공기 중 암모니아 비율이 높아 닭은 호흡기 질환, 발과 무릎 통증, 가슴에 물집 등이 생긴다. 또 눈에서는 진물이 나오며 심할 때는 시력을 잃기도 한다. 6주밖에 생존 후 죽을 때에도 라인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닭은 무의식 상태가 아닌 의식 상태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된다.
닭의 사육 이유 중의 하나는 달걀을 얻기 위함이다. 수만 마리의 닭은 좁고 긴 케이지에 갇힌 채 모이와 물을 먹으며, 달걀을 낳으면 기계로 수집된다. 인공조명으로 불을 밝혀 암탉들이 1년 내내 가장 많은 달걀을 낳도록 한다. 이런 식으로 1년만 지나면 닭들은 지쳐 버리며, 낳는 달걀 수가 적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닭에게 길게는 2주일 동안이나 모이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닭들은 털갈이를 하게 되는데, 일부는 그 기간 중 죽어버리며, 나머지는 체중이 30퍼센트 정도 줄어든 채로 살아남는다. 그러면 다시 모이가 주어진다. 닭은 몇 달 동안 다시 알을 낳다가 마침내 도살된다.
영화 <<미나리>>에는 미국에 이민 간 한국인 부부가 병아리 성별을 감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알을 낳지 못하고 살도 많이 찌지 않아 수익성이 떨어지는 수평아리를 애초부터 분리하여 도살하려는 것이다. 매년 세계에서 60억 마리 이상의 수평아리들이 이렇게 처리된다고 한다.
2005년 10월 유엔 특별조사단은 조류독감 유행의 근본 원인 중 하나가 '다수의 동물들을 좁은 지역에 몰아넣고 기르는 축산 방법'에 있음을 밝혀냈다. "고밀도로 닭을 기르는 방식은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폭발적으로 발생하기 위한 이상적인 조건"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방식대로 길러지는 닭들은 좁은 공간에 갇혀 대규모로 살아가는 시스템의 닭들보다 저항력이 훨씬 높다. 대규모 사육장에서 나오는 오·폐수와 악취가 자연을 황페화 시키고 주민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돼지>
1975년 미국에는 돼지 사육장 66만 개가 있었고 그곳에서 6,900만 마리 돼지를 길러냈다. 2004년엔 돼지농장의 90퍼센트가 사라지고 69,000개만 남았다. 하지만 사육 돼지는 년간 1억 300만 마리로 늘었다. 공장식으로 대규모 된 것이다. 항생제와 성장촉진제, 돼지고유의 습성을 고려하지 않은 좁은 우리, 꼬리절단 등의 학대행위는 여기서도 행해진다.
배설물 처리 문제도 마찬가지다. 성장한 돼지 1마리는 사람의 네배 쯤의 배설물을 내놓는다. 5만 마리나 되는 돼지를 한곳에서 키우며 매일 227톤의 배설물이 나온다.
이는 중간 규모의 도시 하나에서 배출되는 오물과 맞먹는다.
인간의 배설물은 배출 전 정화과정을 거치지만 공장식 농장의 오물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소>
젖소도 최대한의 우유 생산이란 목적에 맞춰 키워진다. 자연 수명 대략 20년 정도인 젖소는 5 -7세 사이에 죽는다. 과도한 우유생산이 원인이다.수컷은 도살되거나 연한 육질의 고기로 키우기 위해 고의적으로 철분을 뺀 먹이로 빈혈을 유발한다. 역시 사육 공간은 좁다. 항생제, 성장촉진제, 근육강화제, 오물과 오염, 잔인한 도살 등의 문제도 같다. 사육소에게는 풀이 아니라 옥수숫대를 먹인다. 이는 마치 사람이 사탕만 먹고사는 것과 같다. 곧 병에 걸린다. 하지만 업자들은 관심이 없다. 송아지는 14개월이면 시장 상품이 될 중량에 도달하기 때문에 기대 수명을 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개인이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는 이제 지속 가능성의 문제가 되었다. 동물 고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야말로 지금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는 거의 모든 환경 피해, 즉 원시삼림 소멸, 표토 소실, 청정수 부족, 대기 오염과 수질 오염, 기후 변화, 생물 다양성 감소, 사회적 부정의, 공동체 파고와 새로운 전염병 창궐 등의 저변에 있는 것이다.
<어류>
어류 양식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밀집사육, 항생제, 배설물 무방비 배출로 해양을 오염시킨다. 사료르르 만들기 위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물고기를 마구 포획한다. 3 - 4톤의 사료를 들여 겨우 1톤의 연어를 생산하는 식의 자원낭비와 파괴가 행해진다.
그럼에도 1970년엔 세계 해산물 시장에서 3퍼센트를 차지하던 양식어업 이제는 3분의 1이 되었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자연산 연어와 양식 연어의 비율은 1 : 300이다. 2005년 뉴욕타임스 조사에 따르면 뉴욕시 가게들 중 75%가 양식 연어를 훨씬 가격이 비싼 자연산 연어와 같은 가격으로 내놓고 있다. 자연산 연어는 크릴새우를 먹어 살색이 분홍빛을 띠는데 양식 연어는 뿌연 회색이 돌게 되므로 인공 착색 도료를 사용한다.
어떤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발전 정도는 그 나라에서 동물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가늠된다는 말이 있다. 육류 생산업자들은 생산속도를 더 늘리고 비용을 더 절감하기에만 골몰한다. 이상과 같은 윤리 문제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는 이들 업계가 환경을 대하는 태도, 사육장 인근에 사는 주민, 일꾼, 그리고 납품업자들을 태하는 태도에서 똑같이 나타난다.
사실 공장식 농업에서 동물을 다루는 방식이 갖는 윤리적 문제는 업자가 선량한 사람인가 아니면 악당이냐가 아니다. 문제는 그 시스템이 동물의 고통을 오직 수익성에 관련해서만 고려한다는 점이다. 문제의 핵심은 경쟁적인 시장 체제에서 동물들을 재신의 일부로 취급하게끔 만드는 경제적 압박이며, 그러한 상황이 법으로 통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채소와 과일, 그리고 곡류>
식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량'과 '밀집'이란 수식어가 들어가면 늘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다른 책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숲에서 나는 버터'로 불리며 다이어트와 건강에 좋은 식품으로 인기가 높은 아보카도 역시 급증하는 시장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대량재배를 시작하면서 생태계 파괴로 비난을 받는다. 재배 지역 확보를 위한 대대적인 산림 파괴와 물의 고갈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한 개의 아보카도를 키우기 위해 소비되는 물은 약 320리터로, 이는 성인 160명이 하루 동안 마시는 양이라고 한다.
자연에 역행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딸기의 철을 앞당기다보니 겨울이 제철이 되었다. 이를 위해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지구를 덥힌다. 밀집 사육되는 식물 재배에 투여되는 농약과 각종 약품들은 결국 인간의 입으로 들어간다. 유전자 조작(GM : Gene(tic) Manipulation) 식물들은 이미 우리의 식탁에 자주 오르고 있다. 2004년 미국에서 수확된 콩의 95퍼센트가 유전자 조작 콩이었으며, 옥수수의 45퍼센트 역시 GM이었다.
우리나라는 식용 GMO(Genen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 변형 농산물)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다. 2015년 기준으로 GMO 수입량은 1,024만톤, 수입 콩의 78%, 옥수수의 50%가 GMO이다. 우리나라 1인당 연간 GMO 소비량은 45kg으로 미국 다음으로 많다. 우리의 밥상을 점령한 GMO. 그러나 주요 곡물 자급률이 24%에 불과해 GMO 수입량은 앞으로도 줄지 않을 전망이다.
GM이 빈곤한 사람들의 복음이 될 지 '프랑켄 푸드'로 악마의 형상이 되어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GMO를 먹으면 유전가가 영구적으로 변한다는 과학자들의 경고가 사실로 드러났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체르노빌이나 후쿠오카 핵발전소의 핵처럼.
"나눔문화"의 자료에 따르면 근래에 들어 20 -30대 젊은 층에 불치병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부부5쌍중1쌍이 불임이며 기형아 출산은 16년 동안 50%가 증가했다. 그 밖에도 한국은 자폐증 발병률 1위, 대장암 1위, 당뇨병 사망 OECD 1위, 유방암 증가율 1위, 치매 증가율 1위, 7년간 성조숙증 여아 27배 증가 등 경악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GMO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GMO가 수입된 지 20여 년만에 생긴 변화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 가공식품 원재료의 70%는 수입산, 그 중 80%가 GMO이다. 그러나 GMO 사용을 표시한 제품을 보기는 어렵다. 식품업계가 ‘GMO 표시 의무’를 피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이 많은 탓이다. (『죽음의 밥상』에는 한국에서는 GM식재료를 포함한 상품은 그것을 표시하는 라벨을 붙여야 하고 미국에서는 그럴 필요 없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8년 가까운 나의 미국 생활 경험으로는 미국에서 GMO 구분은 우리나라보다 쉬웠다. 물론 이것은 내가 유기농식품점이나 그와 유사한 가게를 이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죽음의 밥상』의 선택은 채식과 유기농인 듯하다.
여기서 유기농은 단지 몇몇 합성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을 의미한다. 공동체 형성, 사회정의 실현, 농민에 대한 존경, 농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소비자가 마음대로 볼 수 있게 하는 개방성 등을 지향하는 윤리적 운동으로, 이를 위해 다섯 가지 원칙을 이야기했다.
1. 투명성 :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권리가 있다.
2. 공정성 : 식품 생산의 비용을 다른 쪽에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
(식품의 가격은 그 생산 과정의 총비용이어야 한다.
공해 등의 생산 과정의 문제를 다른 쪽에 전가해서는 안 된다.)
3. 인도주의 :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것은 잘못이다.
4. 사회적 책임 : 노동자들은 타당한 임금과 작업조건을 보장받아야 한다.
5. 필요성 : 생명과 건강 유지는 다른 욕망보다 강하다.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적용받아야 한다.
『죽음의 밥상』에서는 그 선택권이 소비자에게 주어져 있다고 말한다. 소비자들이 기업이 그 노동자들과 납품업자들을 다루는 방식, 또 환경과 가축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기업에게 갈 돈을 다른 곳에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돈을 냄으로써 투표를 합니다. 세상을 해치는 인간들을 더 부유해지지 않도록 하는 거죠."
그러나 그 선택이 올바른 것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개개인이 일일이 식재료의 근원을 파악해서 사실을 파악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결국 이 경우에도 '최후의 보루는 역시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일 수밖에 없다. 그 힘을 통해 우리는 상업화되어 기업과 권력을 대변하는 언론을 걸러낼 수 있고 전문화된 시민단체를 키울 수 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민주주의로 귀결된다.
그 위에서만이 '더 나은 선택이 가능'할 것이다.
책을 읽고 손자에게 삼계탕을 끓여주며 이게 올바른 행동일까 고민이 들었다. 손자는 채소나 견과류 대신에 고기의 맛에 길들여 있다. 나 역시도 그렇다. 나이 들수록 동물성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고 듣고 또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앞으로도 완전한 채식으로 식생활을 전환하기는 힘들 것 같다. 유기농과 비유기농을 구별해서 먹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식생활의 전환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 전반의 개혁을 필요로 하는, 거대하고 지난한 과업이다. 개인적인 결단과 선택이 가져오는 효과가 미흡할지라도 조금은 절제하고 줄이는 것, 식품의 생산과 유통, 이를 결정하는 정책에 이성과 감성의 촉수를 드리워 두는 것, 그래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것이 당장에 필요한 일이겠다. 어린 손자의 '소털처럼' 많은 앞날을 위해서!
*이상 많은 부분은 『죽음의 밥상』에서 별도 표기 없이 인용·편집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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