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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커피, 스타벅스 그리고 횡설수설

by 장돌뱅이. 2023. 5. 27.

얼마 전 저녁을 먹고 난 뒤 딸아이가 집 근처 스타벅스에 가보자고 했다. 새로 생긴 곳인데  41층에 위치해서 전망이 끝내준다는 것이었다. 접근이 쉬운 저층에 위치한 보통의 스타벅스에 비해 특이했다. 때마침 날씨도 좋아서 손자들과 함께 온 식구들이 산책 겸 걸어서 가보았다. 들었던 대로 호수 주변의 야경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문제는 사람들이었다. 꽤나 넓은 매장은 빈틈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까스로 자리는 잡았지만 북새통에 앉아 손자들과 음료를 마시기가 뭐해서 그냥 나왔다.

굳이 41층의 높이를 가지지 않아도 스타벅스에는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많다. 내가 사는 동네에 강변 쪽에 있던 카페가 문을 닫은 적이 있다. 아내와도 산책을 마치고 한두 번 가보기도 했는데 장사가 안 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들어선 스타벅스는 늘 만원이다. 그것도 이전 카페보다 크기를 더 키웠는데도 그렇다. 스타벅스의 힘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할 때는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과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커피를 마셨다. 집에서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7년 여의 미국 생활을 하며 커피가 '자발적으로' 마시는 일상의 음료가 되었다. 스타벅스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를 만나야 할 경우, 골프를 하거나 야간운전으로 여행을 떠날 때, 아내와 산책을 하고 나서 등등, 여러 이유로 스타벅스를 드나들었다. 편리함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커피가 너무 독해서 물로 희석을 시켜서 마셨지만 점차  컵 사이즈를 키워가며 마시게 되었다. 

(*이전 글 참조 :  우리 동네 별다방에서 )

 

우리 동네 별다방에서

오래 전 한국에 있을 적 어느 날 딸아이가 자못 들뜬 목소리로 우리가 사는 동네에 스타벅스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 "'별다방'이 들어오는 게 뭐가 좋은데?아빠가 부업으로 여는 것

jangdolbange.tistory.com

이오덕 씨의 『우리글 바로쓰기 2권』에는 대학신문의 글에서 잘못된(바람직하지 못한) 말을 지적/수정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쓴 글이 나온다.
그중 90년 11월 19일 자 S대 신문의  기사를 바로잡은 글이 있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게 하는 것은 목적의식적인 행동일 것이다. 그러할진대 우리는 무의식 중에 자판기에서, 카페를 찾아가 커피를 마신다.
*목적을 생각한
*저도 모르게

◇그리고 우리의 고유의 것들은 이색적으로까지 느끼어진다.
*우리 고유의 , 우리 자신의

*색다른 것이라 느낀다.

커피의 유입과 함께 철저하게 우리를 엄습한 개인주의·이기주의 ···
*커피가 흘러들어옴과 
*덮친

(이오덕 씨의 글과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대학 신문의 기사는 30여 년 전  대학생들 사이에 커피(문화)가 상당히 퍼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하긴 이미 70년대 대중가요에 '커피를 알았고 낭만을 찾던 스무 살 시절에···' 하는 노랫말이 나왔으니 새로운 일도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커피 마시는 행위를 '목적의식적'이지 못한 비주체적 행동으로 규정하거나 개인주의·이기주의가 커피의 유입과 함께 철저하게 우리를 엄습했다는 해석은, 그래서 우리 고유의 전통차를 마셔야 한다는 대학신문의 주장은 너무 멀리 나간 비약으로 느껴진다. 전통차와 커피가 단순히 기호음료 선택 이상의 의미일 가질 수 없는 터에, 전통차를 '주체적 행동'과 커피를 개인주의와 엮는 것도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어 보인다. 게다가 개인주의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부도덕한 개념도 아니다. 

다만 대학신문의 글이 커피와 청바지, 나이키와 재즈(팝송) 따위를 이른바 '제국주의의 문화적 침투'의 산물로 규정하고 가벼운 술자리에서조차 진지하게 목청을 높이던 후배가 있던 시기에 쓰였음을 기억하며 글이 지닌 다소의 과장과 허물에 너그러워질 수 있을 뿐이다. 슬럼프에 빠진 운동선수가 삭발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종종  자신이 처한 상황과 직접적인 상관없는(?) 어떤 행동을 통해 심기일전을 시도하여 힘든 상황을 타개해 나가려고 하지 않는가. 

당시에 나는 회사에서 손님 만나느라 하루에 예닐곱 잔씩의 커피를  마시면서 다방 마담도 나만큼은 안 마실 거라고  낄낄거렸고,  청바지는 사시사철 입을 수 있다는 편리함에  즐겨 입었으며, 걸음마를 뗀 딸아이에게  빨간 '승리의 여신' 로고가   앙증맞게새겨진 나이키를 첫 신발로 신겼는가 하면, 척 맨지오니,  찰리 파커,  케니 G의 재즈 음악을 즐겨들었지만 그 후배의 열정 앞에선 침묵을 지켜야 했다. 

세상은 무엇인가를 해서 바꿀 수 있고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서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스타벅스의 한국 영업권을 가진 회사 사주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스타벅스를 기피한다는 지인의 말을 30여 년 전 후배의 말처럼 듣기도 한다. 정치적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면 많은 게 건조하고 피폐해질 수 있지만 정치적 시각을 버리면 세상의 허상만 보기 쉬운 법이다.

한 때 기피 대상이기까지 했던 커피를 이제는 아내와 마주 앉아 마시는 빼놓을 수 없는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는, 내겐 그 과정에 스타벅스가 있었다고 쓰려던 것이었는데 글이 너무 휘뚜루마뚜루 뻗어나가 버렸다. 기왕지사 횡설수설이 되었으니 밥 딜런(Bob Dylan)의 이야기도 덧붙여 본다.

밥 딜런은 1975년 프랑스의 한 집시 축제에 갔다가 만난 집시 소녀에게서 영감을 얻어 노래 「One More Cup of Coffee」를 만들었다. 문명에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세상을 평화롭게 사는 아름다운  소녀와 작별을 늦추고 싶은 마음을 '커피 한 잔을 더 달라'는 표현으로 노래한 것이다.

Your breath is sweet
Your eyes are like two jewels in the sky
Your back is straight
Your hair is smooth

On the pillow where you lie
But I don't sense affection
No gratitude or love
Your loyalty is not to me
But to the stars above

One more cup of coffee for the road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
To the valley below······

(당신의 숨결은 달콤하고
당신의 두 눈은 하늘에 박힌 보석 같고
당신의 등은 곧고, 당신이 누워 있는
베개 위 머리카락은 부드러워,
하지만 난 어떤 애정도,
감사의 마음도, 사랑도 느낄 수 없네.
당신의 마음은 내가 아닌
저 하늘의 별들을 향하고 있네.

길 떠나는 사람 위해 커피 한 잔 더,
내가 저 아래 계곡으로 떠나기 전에
커피 한 잔 더 주오.)


글을 쓰면서 창밖을 보니 꾸물거리던 날씨가 비를 뿌린다.  
아내와 'One More Cup of Coffee'를 마시며 「One More Cup of Coffee」를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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