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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김훈의『하얼빈』

by 장돌뱅이. 2023. 5. 18.

김훈의 글은 간결하다. 짧은 문장은 수식어와 감정, 관념과 추상을 극도로 배제한 동사나 형용사로 끝이 난다.  마치 건조한 내용의 수사 기록물이나 보고서 같다.
그럼에도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이 동양화의 여백처럼 깊은 감정을 담고 있다.
개개의 문장들은 안갯속에 서서히 드러나는 육중한 산을 오르는 계단처럼 조밀하게 엮여 있다. 

이전의『칼의 노래』와 『남한산성』과 『흑산』, 그리고 이번에 읽은『하얼빈』이 그랬다.
『칼의 노래』의 표지에는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하얼빈』에도 '칼'을 '총'으로 바꾼다면 같은 부제를 부칠 수 있겠다.
 '단순성' 대신에 '진정성'으로,  '총' 보다는 '말'로 바꾸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건 오욕의 세상에 진정한 '말'을  던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하고 순결한,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은'  청춘의 언어.
'그다음 단계에서의 완성을 도모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언어.
'다른 많은 말들을 흔들어 깨워서 시대의 악과 맞서는 힘의 대열을 이루는' 언어.
그것은 세상에 군림하는 잔인한 폭력을 포장하는 노회한 허위의 언어와는 다른 것이었다.

*1909년 2월 순종 만경대 방문

이토는 사진사에게 사진의 구도와 초점을 미리 지시했다. 이토의 지휘로 일본 기함에서의 영접 의전은 선실이 아닌 갑판에서 열렸다. (···) 사진에 기함의 크기와 포신의 힘이 드러나고, 포신을 배경으로 순종의 표정이 편안하게 나타나고, 뱃전 너머로 수평선이 지나가게 구도를 잡으라고, 이토는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며 사진사에게 지시했다.

사진사는 멀리 떨어져서 카메라를 설치했다. 시양의 범위를 넓게 잡고, 렌즈의 각도를 위쪽으로 오 도쯤 올려 잡았다. 뷰파인더 안에서 돌계단의 폐허가 화면 중앙에 가득차고 그 너머로 송악산의 구름이 구름처럼 떠 보였다. 조선 황제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는 앉았지만 일산이 받쳐져 있어서 거기가 황제의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이토는 그 옆에 희미하게 보였고 군도를 찬 일본군 장교가 그 앞에서 대열을 인도하고 있었다. 돌계단을 내려오느라고 황제의 대열은 흐트러졌다.. 대열이 폐허를 배경으로 종축을 이루었을 때 사진사는 셔터를 눌렀다.

이토는 일본 일본 해군 기함에서 직은 사진과 만월대에서 찍은 사진에 만족했다. 이 사진 두 장이 조선의 운명과 조선의 앞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토는 판단했다.  

일본의 강제합병 1년 전인 1909년 1월에서 2월 초까지 대한제국의 황제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대구, 마산 등을 돌아보는 이른바 '남순행(南巡行)'과 평양과 신의주 등을 돌아보는 '서북순행(西北巡行)을 한다.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고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실제는 반일 감정을 무마하고 일본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홍보에 동원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사진에  심었다. 꼼꼼하고 치밀했다. 

*출처 : 『하얼빈』

저것이 이토로구나······ 저 작고 꾀죄죄한 늙은이가······ 저 오종종한 것이······ 
(···총의 반동을 손아귀로 제어하면서 다시 쏘고, 또 쏠 때, 안중근은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 가늠쇠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이토의 모습이 꿈속처럼 보였다. 하얼빈역은 적막했다.

황해도 신천에서 출발하여 서울-부산-원산-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먼 길과 오랜 시간을 돌아온 안중근은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를 만난 것이다. 
'왕권의 지근거리에서 세습되는 복락을 누린 자들일수록 왕조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갈 때는 새롭게 다가오는 권력에 빌붙으려' 했다. 그들은 이 상황에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드러내고 싶어했다. 아니 황실 자체가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이토가 죽었다는 소문은 26일 밤중에 장안에 깔렸다. (···) 순종은 살길을 생각했다. 조선의 살길과 황실의 살길과 백성의 살길은 겹치고 또 부딪치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살길은 슬픔에 있었다. 이토를 죽인 조선인의 범행은 황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황실의 지주이며 황태자의 스승인 이토공작이 서거한 지극한 슬픔과 그 범인이 극악한 인간말종이라 할지라도 한국 황제의 신민이라는 참담한 두려움을 속히 내외에 공포하고 조선인의 슬픔으로 일본의 분노를 위로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살길은 저절로 떠올랐다. 순종은 메이지에게 위로의 전문을 보냈다. (···) 순종은 전문에서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차마 한국인이라고 쓰지 못하는 심정을 메이지가 헤아려주기를 순종은 바랐다.

순종은 황실의 모든 잔치를 폐했고, 서울에 사흘 동안 가무음곡을 금했다. 순종은 도쿄에서 이토의 영결식이 열리는 시간에 서울 장충단에서 거국적 관민 추도회를 열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순종은 이토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순종은 대신과 관리들과 민간인 대표들은 거느리고 토감부로 가서 이토의 빈소에 조문하고 조위금 십만 원을 전했다.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고위 관리들을 데리고 서둘러 대련으로 왔다. 대련항에 정박 중인 군함 아키쓰시마(秋津洲)가 이토의 시신을 싣고 일본 요코스카항으로 떠났다. 군함이 출항하기 직전에 이완용 일행이 군함에 올라와서 이토의 시신에 분향하고 절했다.


서울 장충단에서 한국 황실과 내각과 민간인들이 합동으로 관민 추도회를 열었다. 흰 베로 장막을 치고 그 안에 이토의 위패를 모셨다. 위패에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써붙였다. 황족과 각부 대신, 고위관리, 한성부민의 임원들, 각 지역 대표들이 이토의 위패에 절했다. 서울의 모든 학교가 수업을 중지했다. 교사들이 학생을 인솔해 와서 절했다. 수도 거주민들은 대문 앞에 삼베를 감은 반기(半旗)를 걸었다. 

지방 군수와 서생들 중에서 힘쓰는 자들이 사죄단, 위문단을 구성해서 일본으로 가면서 그 비용을 주민들에게 걷었다. 발 빠른 자들이 모여서 이토의 죽음을 사죄하러 일본에 가려고 13도 인민 도일(渡日) 대표단을 결성했다. 

도쿄의 한국 황태자 이은은 태사인 이토의 죽음을 애도해서 삼 개월 복(服)을 입고 식음을 간소히 했다.
서울의 무당 수련(壽蓮)은 태황제의 총애를 입어서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대궐을 드나들었다. 수련은 원구단에서 가까운 자리에 굿판을 벌이고 노래하고 춤추어서 총 맞아 죽은 이토의 혼백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빌었다. (···) 이날 굿판에서 육백여 명이 모여서 먹고 마셨는데, 비용은 모두 수련이 자비로 부담했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체포된 후 검찰 조사와 재판에서 시종일관 침착했다.
안중근은 유리한 정황을 들이대지 않았고 불리한 정황을 아니라고 우겨대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태도로 자신이 이토를 살해한 이유를 담담히 밝혔다.

ㅡ이름, 나이 직업을 말하라.
ㅡ이름은 안응칠, 나이는 서른한 살, 직업은 포수다.

ㅡ평소에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가?
ㅡ없다.

ㅡ평소에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ㅡ한 사람 있다.

ㅡ그게 누구인가?
ㅡ이토 히로부미다.

ㅡ왜 이토 공작을 적대시하는가?
ㅡ그 이유는 많다. 지금부터 말하겠다.

ㅡ성공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는가?
ㅡ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

ㅡ그런 원대한 계획이었다면 (···) 도주할 계획을 세웠는가?
ㅡ아니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ㅡ나는 헛된 일을 좋아해서 이토를 죽인 것은 아니다. 나는 이토를 죽이는 이유를 세계에 발표하려는 수단으로 이토를 죽였다. (···)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새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토는 통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태황제를 폐위시키고 현 황제를 자기 부하처럼 부렸다. 또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듯 죽였다. 이토, 이자는 영웅이 아니다. 기회를 기다려 없애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하얼빈에서 기회를 얻었으므로 죽였다. 검찰관은 내가 이토를 오해해서 죽였다고 말하는데, 나는 경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해해서 죽인 것이 아니다.

담담하고 당당하기는 함께 거사를 도모한 우덕순도 마찬가지였다.
재판장 마나베가 물었다.

ㅡ그대는 안중근과 나랏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ㅡ없다.

ㅡ그대는 안중근과 한국의 독립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ㅡ없다.

ㅡ안은 왜 이토를 죽이려 했는가?
ㅡ그것을 안중근에게 들을 필요는 없었다. 모든 한국인이 이토를 증오하고 있다.

ㅡ안의 제안에 대해서 그대는 뭐라고 말했나?
ㅡ다만 함께 가자고 했다.

ㅡ그 밖에 그대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나?
ㅡ어떤 상의도 하지 않았다.

ㅡ안중근은 의병으로서 한 일이라고 하는데, 그대는 의병과 관련이 있는가?
ㅡ나는 다만 일개의 국민으로서 했다.
 의병이기 때문에 하고, 의병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ㅡ그대는 안의 명령에 따른 것인가?
ㅡ아니다. 나는 안에게 명령을 받을 의무가 없다. 또 명령을 받을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명령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한 것이다.

천주교 조선 대목구장 뮈텔은 이미 열여덟 살에 세례를 받은 안중근을 죄인으로 규정했다.
"안중근은 제 발로 걸어서 교회 밖으로 나가서 죄악을 저지른 자이다. 안중근은 이미 교회와 관련 없다. 나는 하느님을 대신해서 그의 죄를 사하여줄 수가 없다."
고루한 원리주의적 교리의 적용, 조직 안위를 우선한 것이다. 이후 천주교는 신사참배를 허락하고 징병제를 칭송하는 친일로 나서기도 했다. 뮈텔의 말은 1993년까지 한국 천주교에서 유효했다. 

(*지난 글 참조 : 
서울 약현성당)

 

발밤발밤1 - 서울 약현성당

발밤발밤 올해는 아내와 함께 생활한 이래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해로 기억될 것이다. 7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을 하였고 바로 뒤이어 딸아이의 결혼이 있었다. 그 두 가지의 큰 변화에 사

jangdolbange.tistory.com


사형선고를 받고 사흘 후에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관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을 들으면서 안중근은 항소는 쓸데없는 짓이 될 것임을 알았다. 이 세상의 배운 자들이 구사하는 지배적 언어는 헛되고 또 헛되었지만 말쑥한 논리를 갖추어서 세상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일제는 사형 집행 전 동양 평화 만세를 세 번 부르게 해 달라는  안중근의 요청은 물론 자신을 하얼빈에 묻어달라는 유언마저 '정치적 성역화'를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시체를 유족에게 내주지 않고 여순감옥 구내 공동묘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었다.
안중근의 사형집행일은 3월 25일이었으나 25일이 한국 황제의 생일이므로 집행은 하루 연기되었다.
대한제국 순종이 안중근을 위해 베푼(?) 유일한 '은전(?)이었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 덧붙였다.

나는 안중근의 '대의' 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준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그의 몸은 대의와 가난을 합쳐서 적의 정면으로 향했던 것인데, 그의 대의는 후세의 필생(筆生)이 힘주어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몸과 총과 입으로 이미 다 말했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위대한 정신은 세속의 명리와 기준에서 자유롭지만 세속을 떠나 홀로 고고하지도 않는 법이다.
『하얼빈』속 안중근이 그랬고 역사 속의 안중근이 그랬다.
작가는 안중근을 영웅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고 하지만 내겐 위대한  정신을 지닌 위대한 영웅이었다.
작가는 또『하얼빈』이 반일 민족주의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읽었다.
이제 민족주의는 계층과 이념으로 갈라져 사회통합적 기능이  빈약해졌다고 작가는 말하지만 일제강점의 역사를  백 년 전의 지난 일로 호도하려는 무리들이 실재하는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여전히 유효한 도구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민주'를 '민족 '보다 우선한다는 원칙만 잊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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