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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탕평채 만들고 먹은 날

by 장돌뱅이. 2023. 5. 10.

음식 만들기 봉사하는 날. 
메뉴는 규아상(옛 궁중의 만두)과 배추겉절이, 그리고 탕평채.

우리 조는 그중 탕평채를 만들었다. 아래 레시피에 나온 양의 30배를 했다. 
1. 청포묵(100g)을 채 썰어 데치고 소금과 참기름에 버무린다.
2. 소고기(40g)는 채 썰어 '간설마 후깨참' 양념으로 재우고 볶는다.
3. 미나리(30g)는 잎을 뗀 줄기만 소금을 넣은 끓는 물에 데치고 물기를 빼 소금, 참기름을 넣어 무친다.
4. 숙주는 '거두절미'하여 소금을 넣은 끓는 물에 데친 후 물기를 빼고 소금, 참기름을 넣어 무친다.
5. 홍고추(1개)'는 가늘게 채를 썬다.
6. 이상의 재료를 초간장(식초+간장+설탕)과 무쳐 그릇에 담고 김가루를 뿌린다.

대부분의 한식 음식이 그렇듯이 탕평채도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재료를 손질하고 채 썰고 데치고 볶고 무치고······.

탕평채(湯平菜)는 탄평채(坦平菜), 묵청포(묵淸泡)와 같은 말이다. 쉬운 말로 녹두묵 무침이다.
영조가 신하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 나온 녹두묵무침이 나왔는데 이 음식을 탕평채로 부르자고 했다는 말이 책이나 인터넷에 자주 나온다. 여러 색깔의 나물이 고루 섞여 조화로운 맛을 내는 탕평채의 의미를  당파에 상관없이 고루 인재를 등용한다는 자신의 탕평책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공식 문서에는 그런 기록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한다.

영조는 궁중 여인 중 가장 낮은 계급인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불리함을 딛고 노론의 힘으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당파 간의 갈등으로 자신의 친아들인 사도세자까지 죽여야 했다. 탕평채에 얽힌 속설은 혹시  뭇사람들이 지긋지긋한 당파싸움에서 벗어나려는 자신들의 소망을 불행한 개인사를 지닌 영조의 탕평책에 설득력 있게 실어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다만 탕평채라는 음식이 그 무렵부터 등장한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풍속을 적은 『경도잡지』나 『동국세시기 』등에 "녹두포를 만들어 잘게 썰고 돼지고기와 미나리 싹, 김을 버무려 초장을 뿌린다. 매우 시원하여 봄날 저녁에 먹으면 좋다. 그 이름을 탕평채라 부른다"고 나온다. 이전까지 탕평이란 '정복하여 깨끗이 소탕한다'는 뜻으로  '난을 평정한다'는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정치는 모든 것을 '정치화' 한다. 음식도 예외가 아니다. 일례로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내한했을 때 청와대 만찬에 독도새우가 올라오자 일본은 '만찬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주장을 선전하는 장'이 됐다는 억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탕평채도 매우 '정치적인(?)' 음식이다. 정치인들은 종종 반목과 갈등을 넘어선 화합, 협치의 의미로 탕평채를 상 위에 올린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이 그랬듯 노회한 정치인들의 꿍심이 음식 한 그릇으로 바뀔 리 없을 것이니 다분히 보여주는 행위일 뿐이다. 탕평채가 오래된 음식이지만 한정식의 필수 메뉴가 된 것은 이른바 '요정정치'가 득세하던 70년대 중반 강북의 한정식 요정에서 교자상 위에 자주 올리면서부터라고 한다. 색도 곱고 예쁜  탕평채 입장에서 보면 조금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식은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오방색(五方色)이 한 특징이다.
오방색은 음양오행의 전통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혹은 중앙과 동서남북의 방위를 뜻하기도 한다. 
탕평채는 볶은 소고기,  미나리, 청포묵, 숙주나물, 고추, 김가루 등 오방색을 완벽히 구현한다.
이외에 비빔밥(골동반), 구절판 등이 대표적이다. 

음식봉사가 끝나고 집으로 오면서 마트에 들러 탕평채 재료를 샀다.
아직 손끝이 '따끈따끈'할 때' 아내를 위해 저녁상에 탕평채를 올리고 싶었다.
집에 와 낮에 했던 레시피를 그대로 반복하면서 한 가지 달걀노른자만 고명으로 추가했다.

음악을 틀고 맥주를 따르고 탕평채를 사이에 두고 아내와 마주하는 시간에는 나른하고 고즈넉하다.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는 신명 같은 것이 어깨 위로 솔솔 피어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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