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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MOOR-EEFFOC

by 장돌뱅이. 2023. 5. 15.

딸아이네가 선물해 준 꽃

『올리버 트위스트』,『크리스마스 캐럴』등으로 유명한 19세기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어느 날 카페에 앉아 있다가 유리문에 'MOOR-EEFFOC'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그 이상한 단어는 그에게 뭔가 신비로운 상상을 불러일으켰고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COFFEE-ROOM'이라는 단어를 카페 안쪽에서  거꾸로 읽었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지만 상상과 충격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리고 일생을 두고 그의 창작 활동에  마법 같은 힘을 선물했다고 한다.

이후  'MOOR-EEFFOC'이라는 단어는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느끼게 해주는 의미로 사람들 사이에 사용되었다. 나에게는 그렇게 삶의 전환을 이루는 특정 단어나 극적인 순간의 기억이 없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일상의 시간을 채워 나가는 평범한 모든  일들이  '특별'하지 않나 하는 상투적인 생각을 자주 해보게 된다.

아내와 음악을 들으며 나누는  커피, 맛난 음식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식탁, 함께 읽는 책, 함께 걷는 강변과 공원······ 이제 막 장기(將棋)를 배우기 시작한 손자가 한 수를 둘 때마다 짓는 심각한 고민의 표정, 함께 뒹굴 때면 어디선가 늘 풍겨오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  아무 말을 두서없이 해도 편한 사람들과 걷는 초록의 숲길······ 최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어설픈 솜씨의 그림과 마술 놀이······ 

매일 음식을 만드는 일은 내게 각별하다. 전기밥솥에서 안내 목소리와 함께 증기가 빠져나오는 소리는 커다란 즐거움이 도래했다는 신호처럼 들린다. 대부분 경우 내가 만드는 음식은 아내와 손자, 딸과 사위를 위해서다. 그들의 취향을 고려해서 재료 선택과 사용하는 양념을, 불의 세기를 다르게 해야 한다. 무침과 볶음과 찜과 찌개와 국과 탕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그 번거로움이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는 건 가족이라는 관계가 주는 마법이다. 아내는 자신의 권력(?) 서열이 언제부터인가 손자 다음으로 밀렸다고 즐겁게 투정한다.

결국  'MOOR-EEFFOC'는 특정 기억이나 의미라기 보다는 뭔가가 존재하고 작용하는 시점, 즉 '바로 지금'이 본질 아닐까? 누군가 말했다. 지금 밥을 먹고 있다면 '맛있는 밥'이  삶의 정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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