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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하는 일 없이 배회하러

by 장돌뱅이. 2023. 4. 9.

한 사람이 장자(莊子)에게 불만을 말했다.
"나에게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큰 줄기는 뒤틀리고 옹이가 가득해서 먹줄을 칠 수 없고, 작은 가지들은 꼬불꼬불해서 자를 댈 수 없을 정도지. 길가에 서있지만 목수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네."
그러자 장자는 이렇게 답했다.
"자네는 그 큰 나무가 쓸모없다고 걱정하지 말고,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마을(無何有之鄕)' 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그 주위를 '하는 일 없이(無爲)' 배회하기도 하고, 그 밑에서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게. 도끼에 찍힐 일도, 달리 해치는 자도 없을 걸세. 쓸모없다고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것이 없지 않은가?"

장자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도 그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못생긴 나무의 쓸모를 즐기고 싶다.
사람의 삶은 크게 노동과 휴식으로 구성된다. 하루가 그렇고 한 달이 그렇고 일 년, 일생이 그렇다. 
노동은 현실이고 휴식은 상상이다. 노동은 우리를 먹여 살리고 휴식은 노동을 먹여(?) 살린다. 노동에는 곧고 옹이가 없는 나무의 구체가 필요하고 휴식은 나무에서 비롯되지만 나무와는 별개인그늘과 같은  빈 공간의 추상이 필요하다. 

아내와 떠나는 여행은 '아무 것도 없는 마을의 넓은 들판'에 있는 나무 그늘을 찾아가는 행위다. 
 기계적인 땀과 근육, 건조하게 주고받는 거래, 이기적인 고함과  경쟁에서 벗어나 '하는 일 없는 배회'와 '한가로운 낮잠'으로 잠시 나비 꿈을 꾸러 가는 것이다.
'내가 나밖에 될 수 없고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는 그 시간을 위하여.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뭇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 장정일,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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