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밤 비행기가 싫어졌다.
젊었을 때는 비행기에서 구겨져서 자고 나도 몸이 거뜬해서 마치 하루를 벌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아했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아침, 무슨 충성을 하겠다고 공항에서 바로 회사로 출근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깊은 잠을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몽롱한 상태에서 도착하게 된다.
귀가를 해서도 여독에 더해진 밤 비행기의 후유증은 종종 뒷날까지 이어진다.
백수가 된 뒤의 여행이란 업무의 부담이 없는 휴식임에도 그렇다.
코로나가 지난 후 세 번의 여행을 하는 동안 발리를 제쳐두고 태국으로만 갔던 데에는 여행지로서 두 곳의 선호 대비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단순히 밤 비행기를 피하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
대한항공 발리 편은 오후 5시 50분에 출발하여 현지시간 23시 45분에 도착한다.
우리나라와 시차는 1시간이므로 우리의 신체 감각으로는 밤 12시 45분이다.
입국검사대에는 밤이 무섭지(?) 않은 인파들이 대거 몰려 있었다. 일찍 공항을 나가긴 글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날 발리 입국이 많이 늦어진 건 단순히 인파 때문만이 아니었다.
발리를 가면서 항공편과 숙소 예약 외에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
이미 십여 차례 가 본 곳이고 관광보다는 숙소에서 머물며 수영을 하거나 숙소에서 가까운 주변을 산책하며 식사와 쇼핑을 할 예정이므로 달리 준비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깜빡한 것이 있었다. 우선 입국 비자가 필요했다. 다행히 이건 도착해서 "VISA ON ARRIVAL"을 받으면 되는 사안이었다. 오래 전부터 있었던 제도인데 잊고 있었던 것이다.
비용은 인당 미화 34불로 비쌌다. 예전 비용이 얼마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많이 오른 것 같았다.
미화로 지불해도 거스름 돈은 인도네시아 루피아로 준다는 것도 조금 어거지가 있어 보이는 규칙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고 세관심사대를 나가려는데 역시 사람들이 긴 줄을 형성하고 있었다. 뭐지? 앞에 서있던 서양 여인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이쪽이 'Nothing to Declare'가 맞냐고 물었다.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지만 나도 점점 자신이 없어져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그러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손에 QR코드가 인쇄된 종이표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인도네시아 입국 전 3일 전부터 인터넷으로 세관신고를 하여 QR코드를 받아야 했다.
미처 준비를 못한 사람은 공항에서 입국 심사대를 나오면 준비되어 있는 컴퓨터에 등록 사항을 입력하고 프린트를 하면 되었다. 항공사나 공항의 누구도 그걸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다. 공항 안에 안내판도 없었다(못 보고 지나쳤을 수 있다).
하는 수 없이 이미 한참을 기다린 줄에서 빠져나와 컴퓨터 있는 곳으로 갔더니 거기도 또 긴 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입력사항은 예전 종이에 쓰던 걸 그대로 컴퓨터로 옮겨온 것뿐이었다. '이상의 내용이 다 사실'이라고 확인하고 버튼을 클릭하니 '대망의' QR코드가 나왔다. 도대체 이런 번잡한 절차를 누가,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고블록!(멍청한)', '시알란!(제기랄)' 같은 옛 기억 속의 인도네시아 욕설을 떠오르게 했다.
공항 밖으로 나온 건 발리에 도착한 지 두 시간이 가까이 지나서였다.
요즈음 손자저하 1호는 속담에 관심이 많다.
이런 나의 실수를 알았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으리라.
아는 길도 물어가라!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
'묻지도 않고 두드려보지도 않'고 떠나온 덕분에 한국시간 새벽 3시가 지나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나마 공항 가까이에 숙소를 잡아둔 것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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