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평소보다 감정의 폭이 넓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무와 숲, 사람들의 표정과 언어, 바람과 햇살 같이 무심히 지나치던 것들을 예민하게 포착하거나 더러는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도 된다. 더군다나 그곳이 소중한 '첫' 경험의 장소라면 감정의 파장은 더욱 증폭될 수 있다.
모든 '첫' 경험의 기억은 종종 일생을 관통할 만큼 끈질기고 강력하지 않던가.
아내와 내게 발리가 그렇다. 발리의 모든 곳은 자주 30여 년 전 발리의 기억으로 이어지곤 한다.
'첫' 해외근무의, '첫' 외국 인도네시아, 그리고 딸아이도 같이 갔던 '첫' 발리······.
요즘과 같은 인터넷이나 다양한 여행안내 서적이 없던 90년대 초 아내는 한국대사관에서 인도네시아어를 가르쳐주던 선생님이 전해주는 발리 정보와 팁을 꼼꼼히 적어왔다.
거기에 내가 숙소와 항공을 예약한 여행사에서 얻은 정보를 더해 우리는 '첫' 발리를 여행했다.
그 발리 여행의 '첫' 기착지는 꾸따(KUTA) 해변의 BINTANG BALI HOTEL이었다.
특급호텔은 아니었지만 그때까지 한국에서 민박과 텐트로 여행을 다니던 우리의 눈에는 호사스럽기만 했다. '발리에서는 호텔 정원을 산책하는데만 반나절은 투자하라'는 인도네시아어 선생님의 팁이 과장이 아니라고 느낄 만큼 만큼 호텔의 정원은 열대의 우거진 숲 같았고, 바닷가에 가까이 붙어 있는 수영장도 마냥 시원스럽게 보였다.
그 뒤로 꽤 여러 번 발리를 여행했지만 그것들의 기억은 때와 장소가 서로 뒤섞여 혼란스러운 반면, 첫 여행은 잘 정리된 요점노트처럼 원형에 가까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번 여행의 첫 숙소 역시 꾸따였다. 아침마다 아내와 숙소 주변을 산책했다.
마침 근처에 우리가 처음 발리에 왔을 때 묵었던 빈땅 발리 호텔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호텔 정문에서 시작하여 옛날처럼 로비와 정원과 수영장을 지나 바닷가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30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호텔의 겉모습과 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은 듯했다. 옅어진 기억 속에 여전한 것은 여전해서, 변한 것은 변해서, 사라진 것은 사라져서 옛 기억들을 불러왔다.
사진을 찍어서 딸아이에게 보내주며 옛 기억을 공유했다.
"여전히 좋아 보이는데용.^^"
세월이 흘러 이제 자칭 '전투육아'의 엄마가 된 딸아이가 답변을 주었다.
추억은 단순히 과거의 고정된 기억이 아니라 소환될 때마다 현재를 새롭게 하는 유동적 실체다.
동시에 현재 또한 모든 추억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재구성하는 바탕이 된다.
나는 꾸따의 아침 해변을 걸으며 가만가만 아내의 손을 잡아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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