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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D.P.>>, '그놈'의 군대 이야기

by 장돌뱅이. 2023. 8. 3.

군대이야기는 종종 남자들 사이에서 세대를 관통하는 소통의 소재이자 주제가 된다.
이야기들은 입에서 입으로 떠돌며 과장되거나 변형되어  술자리에 단골 안주로 오르곤 한다.

야전삽 하나로 막사를 지었다는 '까라면 까야하는'식의 무용담, 졸병 때 변소에서 먹은 보름달 빵의 애환담, '원산폭격'쯤이야 잠을 자면서도 할 수 있는 자세라는 짬밥의 내공담, 수통에 물 대신 술로 채우고 훈련에 나갔다 걸려서 완전군장으로 고지를 오르내리며 달려야 했던 고생담, 따위······.
부대의 종류나 복무 시기와 상관없이 경험담들은 대체적으로 비슷비슷하다. 아마도 일반병들의 군대 생활이 어디나 대동소이한 데다 세월에 흘렀어도 중요한 것들이 많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구 어머니, 요즘은 민주군대라 옛날처럼 맞고 때리는 거 없어요."
어머니의 걱정에 내가 대답하기 전에 함께 온 친척이 먼저 대답했다. 1979년  나를 만나러 온 부대 면회장에서였다. 현직 직업 장교였던 그의 말에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려는 배려가 스며 있었다. 

나는 간밤에 '한 따까리'를 당하면서 생긴 군복 안 상처가 묵직하게 느껴지던 상태였다. '한 따까리'는 전체가 집합을 해서 기수별로 구타를 당하는 일이었다. 우리 졸병들끼린 '푸닥거리'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아들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오신 늙으신 어머니께 내가 무슨 다른 말을 하겠는가.
"어머니, 제발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요새는 고참이라고 함부로 못 때려요. 옛날이랑 달라요."

한국의 젊은이에게 군대는 예나 지금이나 입대 전까지 키워왔던 꿈을 잠시 유보해야 한다는 것만으로  부담스러운 '통과 의례'임에 틀림없다.
거기에 물리적인 폭력까지 가해진다면 그것은 악몽이 된다.

군대는 사회적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체다. 출신, 학력, 성장 과정, 성격 등이 각각이다. 게다가 병역법에 따라 '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들어온 비자발적인  조직이다. 원만한 관리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최종 책임은 어쨌거나 국가에 있다는, 군인들이 군 생활을 마치고 온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보장하는 일은 국가 또한 국민에게 진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점은 명백하다.

넷플릭스의 드라마 <<D.P.>>는 그런 군대의 이야기다.
D.P.(Deserter Pursuit)는 군 탈영병을 추적·체포하는 군헌병대 조직을 말한다고 한다.

제목과는 달리 드라마의 초점은 추적자들이 아니고 도망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도망자가 된 내력, 즉 군대 내에 오랫동안 똬리를 틀고 좀처럼 물러나지 않는 그놈의 폭력에 맞춰져 있다.

<<D.P.>>에서 그려진 (2014년의?) 군대는 1979년에 내가 경험한 군대보다 추행과 모욕과 폭력은 더 노골적이고 잔인해진 듯하고, 이를 은폐하려는 시도는 치밀하고 교묘해진 듯했다. 

"하, 차라리 군대가 바뀔 거라고 하십쇼."
"바뀔 수도 있잖아. 우리가 바꾸면 되지."
"저희 부대에 있는 수통 있지 않습니까. 거기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아십니까?"
"어?"
"1953. 6.25 때 쓰던 거라고. 수통도 안 바뀌는데 무슨."
- <<D.P.>> 시즌1, 선임들의 가혹행위를 못 견뎌 탈영을 한 병사와 D.P.가 나눈 대화 -

한국전쟁 때 쓰던 수통을 아직도 쓴다는 건 무리가 있어 보이는 설정이지만 폭력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기에는 충분했다. 탈영병은 상황을 바꾸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고 울부짖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강한 절망의 표현밖에 없었다. 그의 자살 후에 비극의 원인은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일탈로 발표된다. 

<<D.P.>> 시즌1은 폭력의 디테일한 실상과 이야기의 전개가 촘촘하여 설득력 있다. 강한 여운도 인상적이다. 이에 비해 시즌2는 굳이 군대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흔한 액션 영화였다. 약간의 반전 복선을 깔았지만 이미 여러 영화를 통해 익숙해진 방식이라 크게 놀랍지는 않았고 긴장감은 느슨했다.
나로서는 시즌1>>>>>시즌2였다.
아내는 정해인 때문에 본다고 했다.

군대 생활 중. 왼편이 나고 오른쪽은 나중에 개그맨이 된 심형래다.

내게 군대 생활은 오직 제대 날짜를 기다리는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사회적 동질성이 크지 않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린 특별한 경험의 시간이기도 했다. 화물트럭 운전수, 농부,  역술인, 차량수리공, (훗날 유명 개그맨이 된) 연예인 지망생, 영화 촬영장 보조 등등. <<D.P.>>시리즈를 보며 지금은 몇 장의 사진 이외에는 잘 그려지지 않는 그 얼굴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중 한 사람, 훈련소에서 만난 나이트클럽 웨이터도 있다. 학교에 다니다 온 나를 부러워하던 그는 입대 전 지방에 있는 클럽에서 웨이터도 하고 가끔씩 무대에서 노래도 불렀다고 했다.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나는 그가 고향을 떠나온 이래 내가 모르는 도시의 이면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세상을 깨우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은 거칠면서 순박했고, 관념과 추상이 들어있지 않아 담백했다.

그는 태어나 처음 자신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건 한 여자를 만나면서부터라고 했다. 입대 직전 그는 그녀가 임신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장에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그녀는 낙태를 하고 예전의 클럽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그의 괴로움이었다. 기다리겠다고 했다지만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에서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우울해했다. 

마침내 낙태를 했다는 편지를 받은 날, 야간각개전투 교육을 받기 전 짧은 오락회에서 그는 자청하고 나가 '노래 일발을 장전하고 발사'를 했다. 애절하고 구성진 노래였다.
해가 기울어가며 남긴 붉은 노을이 처연한 분위기를 더했다.
"기운 빠지게 뭔 장송곡을 불러? 신나는 노래 없어? " 조교는 타박을 했지만 박박 머리에 허름한 군복을 걸친 우리 훈련병들은 그의 노래에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눈시울이 붉어져 자리로 돌아오는 그의 등 뒤로 하늘 저 멀리 저녁새 한 마리가 검은 실루엣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딕훼밀리의 노래 「흰구름 먹구름」은 그렇게 알게 되었다.
그에게 가사를 적어달라고 했고, 그에게 배웠다. 훈련소를 마치고 그와 헤어졌다.
이 노래를 들으면 그가 떠오르고 그를 생각하면 이 노래가 떠오른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녀와 사랑은 이루어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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