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단편소설 「칼자국」은 이십여 년간 칼국수 장사하며, 무능력하고 바람까지 피운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정을 이끈 억척스럽고 부지런하면서도 다정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그렸다.
어느 날,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곯아 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오랜 세월, 어머니는 뭘 재우고, 절이고, 저장하고, 크게 웃고, 또 가끔은 팔뚝의 때를 밀다 혼자 울었다. 여자가 칼 갈아 쓰면 팔자가 드세다는데 아직까지 서방이나 새끼 잡아먹지 않은 걸 보면 괜찮은가 보다 능청도 떨면서. 생일이면 양지를 찢어 미역국을 끓이고, 구정에는 가래떡을 뽑고, 소풍날은 김밥을, 겨울에는 동치미를 만들어 주었다. 그사이 내 심장과 내 간, 창자와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음식에 난 칼자국들 역시 내 몸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나를 건드렸다. 나는 그 사실을 몰라 더 잘 자랐다. 한 해가 지나면 어머니는 가래떡을 썰고, 다시 한 계절이 지나면 푸른 콩을 삶아 녹색 두부를 만들었다. 나는 더운 음식을 먹고 자랐고 그 안에선 늘 신선한 쇠 냄새가 났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니 세상에 저절로 그렇게 된 '당연'은 없다. 나 역시 어려선 어머니가 칼자국 낸 음식들로 내 몸의 구석구석을 키웠고 결혼한 뒤로는 아내가 칼자국을 새긴 음식들로 몸을 유지시켜주었다. 소설 속에 그려진 어머니의 모습이 지난 세월 내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이어서 애잔해진다.
부엌에 쪼그려 앉아 칼 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모든 짐승들의 어미가 그렇듯 크고 둥글었다. 허리 군살에 말려 올라간 티셔츠, 팬티 위로 함부로 보이던 허연 엉덩이 골. 나는 어머니의 뒤태에서 곧 사라져 갈 부족의 그림자를 봤다.
어머니는 나흘에 한 번꼴로 김치를 담갔다. 큰 '다라이' 안에 상체를 박고 양념을 버무리던 어머니의 모습은 가게 앞 오랜 풍경 중 하나였다. 어머니는 '다라이로 통하는 저 지하 세계에 빠져들지 않으려 버둥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머니가 잘 익은 배추 한 포기를 꺼내 막 썰었을 때, 순하게 숨 죽은 배추 줄기 사이로 신선한 핏물처럼 흘러나오던 김칫국과 자그마한 기포를 기억한다. 어머니가 국수를 삶으면 나는 그 옆에 서서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렸다. 어머니는 갓 익은 면발 한두 젓가락을 건져 주었다. 그런 뒤 맨손으로 김치를 집어 입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 줬다. 김치에선 알싸한 사이다 맛이 났다. 내 컴컴한 아가리 속으로 김치와 함께 들어오는 어머니의 손가락 맛이랄까, 살(肉) 맛은 미지근하니 담담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들어와 국수 두 개를 시켰다. 손님이 방을 원해서 어머니는 안방에 상을 봐줬다. 국수와 고추 다대기,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다. 사내는 빈 그릇을 하나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왜 그런가 싶어 사내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사내는 자기 맞은편 국수 위에 빈 그릇을 엎어 놓았다. 혹여 국수가 식을까 봐 그러는 거였다. 곧이어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방긋 웃은 뒤 그릇을 걷고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조용하고 친밀하게 국수를 먹었다. 어머니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런 일상적인 배려랄까, 사소한 따뜻함을 받아 보지 못한 '여자의 눈'으로 손님을 대하는 순간이었다. 밥 잘하고 일 잘하고 상말 잘하던 어머니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살면서 중요한 고요가 머리 위를 지날 때가 있는데, 어머니에게는 그때가 그순간이었을 거다.
소설의 주제와 상관없이 마음을 따뜻하게 했던 대목이다.
사소한 배려와 보살핌, 존중을 받는 순간들이 모여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는 것 아닐까?
아직 서툰 나의 칼자국이 스민 음식들이지만 아내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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