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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카눈'이 있는 저녁

by 장돌뱅이. 2023. 8. 12.

제6호 태풍 카눈은 11일 오전에 평양 남쪽에서 소멸됐다. 카눈은 무려 14일 3시간이라는 긴 생존 기간과 예상을 깬 갈지자 행보, 난데없는 한반도 종단으로 우리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1951년 이후 발생한 1881개의 태풍 중 카눈처럼 2주 이상 태풍의 세력을 유지한 경우는 채 1%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열대 과일 카눈(사진 출처: PIXA BAY)

카눈(Khanun, ขนุน)은  원래 잭푸르트(Jack Fruit)로 알려진 열대 과일을 부르는 태국말이다.
캄보디아에서도 같은 말을 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낭까(nangka), 라오스에서는 크노(Khnor), 베트남에서는 막미(Mak mi) 또는 마이미(May mi)라고 한다.
지금은 잭푸르트가 어디서나 통하는 공용어가 되었다.

잭푸르트는 서양 남자 이름 잭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동남아에서  작(Jak)이나 자카(Jaca)로 불리는 이 과일의 나무를 서양인들이 '잭'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펜과 색연필로 그려 본 카눈

잭푸르트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과일이다. 길이는 20cm 이상 90cm, 폭은 20cm에서 50cm에 달하며 무게는 4.5kg에서 큰 것은 50kg까지 나가는 것도 있다고 한다.
양파 자루나 옛날 우리나라의 동그란 베개  같은 모양새다. 얼핏 보면 두리안과 비슷하지만 표면이 두리안처럼 굵고 뾰족한 가시 대신 오돌토돌한 돌기로 덮여 있다. 윤기가 흐르는 노란색 과육은 은근한 단맛을 낸다. 잘 익은 것은 직접 먹기도 하지만 샐러드 등 다양한 요리에 쓰인다.

🎵Music provided by 브금대통령 🎵Track : My Little Baby

태풍이 남해안에 상륙하여 수도권으로 향하는 저녁, 손자저하들과 만났다.
저하들은 며칠 안 본 사이에 익힌 새로운 개인기를 자랑했다.
1호는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끽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잘(?) 들어보니 '나비야 나비야'였다. 
'옛날에 즐거이 지낸던 일···(그 옛날에)'도 연주를 했다. 아내와 나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2호는 혀를 입천장에 부딪혀 똑딱똑딱 시계 소리를 냈다. 그걸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목욕을 하는 중에 푸시업 자세를 취하며 내가 깜짝 놀라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태국  말 '카눈'엔 과일 이름 말고 이번 태풍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복'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고 한다. 밤이 깊어지면서 창밖으로 흔들리는 가로수와 거세지는 빗줄기가 보였지만 손자저하와 보내는 시간에 태풍의 걱정이 끼어들지는 않았다.
나는 저하들이 부르는 '할아버지!'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카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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