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서는 천명관의 장편소설『고래』에 대한 감상 이전에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힘들다.
원래 가장 어려운 것이 시대나 흐름 따위를 거시적인 안목으로 담아내는 무슨무슨 개론(槪論)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개론은 미시적인 각론을 두루 섭렵한 후에야 가능할 터이니 나로서는『고래』를 두고 그저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요약하는 것이 정직한 태도일 것이다.
'국밥집 노파, 금복, 춘희로 이어지는 여인 삼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라고 하면 너무 상투적인 광고 문안 같고, 노파의 잔인한 복수극이라고 하면 금복과 춘희의 존재감이 사라진다.
그리고 깡패, 애꾸, 반편이, 곰보, 점보, 쌍둥이 자매, 간수, 트럭운전수 같은 무수한 등장인물의 순정, 사랑, 욕망, 폭력, 살인, 성취, 몰락의 서사가 묻힌다.
무엇보다 이들을 그려내는 데 동원된 전설, 신화, 민담, 농담, 괴담, 기담, 야설, 요설, 포르노, 과장, 허풍, 구라, 능청, 파격, 해학의 능청러운 글(말)솜씨를 빼놓을 수 없다.
다방은 날로 번창했다. 사람들은 으레 다방에서 약속을 했고 다방에서 맞선을 봤으며 다방에서 바람을 맞았다. 평대다방은 그들의 고단한 삶의 휴식처였으며 은밀한 거래가 오가는 접선 장소이자 하릴없는 건달들의 아지트였다. 다방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평대 사람들에게 많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마약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으며 오랫동안 그들의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그들이 평생 맛보지 못한 우아한 정취와 로맨틱한 감정, '바람을 맞다'라는 새로운 표현, 미스 김, 혹은 미스 박, 또는 유 마담, 펄 시스터즈가 부른 <커피 한잔>의 전국적인 히트, 껌, 축구경기, 아메리칸 스타일, 혹은 블랙이란 이름의 만용과 쓰디쓴 후회, 죽돌이 또는 죽순이란 신조어, 쌍화차, 미팅, 담배 소비의 증가, 성냥을 쌓거나 부러뜨리는 나쁜 습관, 퀴즈의 발달, 참새 시리즈, 구석자리에서의 키스, 벽돌 깨기, 킹 크림슨의 <Epitaph>와 신청곡을 적을 수 있는 작은 메모지, 디제이라는 새로운 직업의 등장, 오늘은 왠쥐, 라는 느끼한 발음, 배달과 티켓, 그리고 '여기 리필 좀 더 주세요'라는 잘못된 영어의 남용 등등······
이날 쏟아진 구호들 가운데, '벽돌을 못 쓰게 죄다 깨드려버립시다!'나, '가마를 부숴버립시다!' 혹은 '공장에 불을 질러버립시다!'와 같은 주장은 잔뜩 화가 난 일꾼들 사이에서 일견 나올 법한 얘기였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파쇼에게 죽음을! 노동자에게 생존권을!'이나 '재벌독재 타도하여 노동자 천국 이룩하자!'와 같은 구호는 산골짜기에 있는 벽돌공장에서 써먹기엔 다소 유난스런 감이 없지 않았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나 '수령님의 영도 따라 미제를 박살 내자!'와 같은 구호는 다소 수상한 감이 없지 않은 데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벽돌공장 웬 말이냐!'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독재 물러가라!'와 같은 구호는 다소 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는데, 또 어디선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영숙아, 사랑해!'나, '씹할, 그때 홍싸리를 먹는 건데'와 같은 소리는 그야말로 구호도 아니고 뭣도 아닌, 분위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내지른 잡소리에 불과했다 아니할 수 없다.
文에게 (아내의 외도) 소문을 전해준 사람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 수백 마지기를 노름으로 몽땅 날리고 마누라까지 잡힌 끝에 결국 오갈 데 없는 뜨내기 신세가 된 한 나이든 인부였다. 그는 한껏 조심스럽고 완곡하게, 언제나 소문과 함께 장식처럼 따라다니는 변명들을 장황하게 섞어, 예컨대, 자신은 결코 입이 싼 사람이 아니며, 본시 떠도는 소문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쓸데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며, 그런 짓은 앉아서 오줌 누는 계집이라면 모를까 불알 달린 사내로선 차마 할 짓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못 들은 걸로 하고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당사자를 위하는 것이냐, 아니면 들은 대로 정직하게 알려주는 게 올바른 것이냐 하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하다, 그래도 혹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소문이 사실일까 염려되어, 만일 그렇다면 혼자만 모르고 있는 文이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나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다시금 얘기하지만 자신은 오로지 文을 생각하는 마음에 털어놓기는 털어놓되, 소문이란 건 어디까지만 믿을 게 못 되는 데다 나중에 알고 보면 결국 뜬소문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아, 그럴 땐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게 상책이니, 구태여 진실을 캐고자 하면 못 캘 것도 없지만, 꼭 그렇게 해서 사달을 일으켜야만 속이 풀리는 건 아니더라도, 이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한번 확인을 하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한데, 한편 생각하면 그저 술 한잔 먹고 잊어버리는 게 현명한 처신이 아닐까 싶기도 한 게 아닌 게 아니냐며, 병을 주는 동시에 약을 주는 요사스런 화법으로 그 수상한 소문을 전했을 때, 文은 그 자리에서 소문을 전한 인부를 당장에 해고해버리고 말았다.
큰 물고기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은 지난 전쟁에서 등장한 신무기, 즉 미사일을 가리킨다는 거였다. 미사일이 마치 물고기처럼 유선형으로 생긴 데다 뒤에 나오는 불기둥이란 말과 정확하게 호응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곧 미사일론에 대한 반박이 뒤따랐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노파가 어떻게 미사일을 아느냐는 거였다. 귀신이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다는 해명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하는 반박이 나왔으며, 뒤이어 어따 대고 선배 앞에서 그따위 개소리를 하느냐는 성명이 발표되자, 너 대학 어디 나왔냐는 질문이 나왔고, 이 씹쌔야, 어딜 나온 게 무슨 상관이냐는 반론이 제기되자, 저 새끼, 싸가지 없는 건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는 인물평과, 저 새끼는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시켜 버려야 된다는 매장론이 뒤따랐으며, 선배 무시하다 뒈지게 맞고 피똥 싼 놈 많다는 협박과, 누군 씹할, 고스톱 쳐서 학위 딴지 아냐는 고스톱 학위론, 그럼 씹쌕꺄, 미사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냐, 뭐긴 뭐야, 색꺄, 니 애비 좆이라니까,라는 식으로 반박이 줄줄이 이어지며 논쟁은 점점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어 갔다.
소설가 은희경은 책 말미에 붙은『고래』에 대한 심사평에서 "어지럽게 모아지는 파편들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정연한 하나의 그림으로 모아지는 그런 의도된 질서는 느껴지지 않았다"며 "이 모든 이야기의 성찬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소설이란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소설에 대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내게 들었던 혼란을 명쾌하게 정리해 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하나의 그림'이나 '의도된 질서', '어쨌다는 것이냐'가 없으면 어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 『고래』를 읽으며 우선 내게 떠오른 이미지는 장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길이가 몇 천리가 된다는 물고기 곤(鲲)이나 한번 날아오르면 날개가 구름처럼 하늘에 드리운다는 새 붕(鵬) 같은 어떤 '거대함'이었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바다의 '고래'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오지 않는가. 소설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인 금복은 '작고 누추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거대함'의 실체는 무엇일까? 조밀하게 조직된 '현대 사회의 질서 속에서 스러져가는 원시적 생명력, 장쾌한 상상력이나 투박한 아름다움' 같은 것일까?
여러 종류의 작은 물고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물건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탄성을 질러댔지만 금복은 왠지 자신의 삶을 베어내는 것처럼 마음이 쓰라렸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생명체가 그렇게 덧없이 고깃덩어리로 변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사람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내장을 다 드러낸 채 해체되어 가는 고래의 처지가 마치 걱정과 지신의 처지처럼 여겨져 저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녀는 애써 울음을 삼키느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구경꾼들 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주저앉아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작가는 안터뷰에서 이 소설은 '지난 세기에 관한, 그 리고 그 시대에 벽돌을 만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고래』가 그리는 '지난 세기'에 사실적인 역사는 담겨 있지 않다. '역사는 모두 지워버리고 그 대신 세상에 떠도는 얘기들을 채워넣었'다는 것이다. '벽돌을 만드는' 행위, '세상에 떠도는 얘기들'과 '그 시대의 벽돌이나 사람'의 관계 도 내겐 어렵다.
그럼에도『고래』는 글을 읽은 재미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현란하고 장황한 이야기의 성찬 끝에 (혹은 도중에) 문득문득 감동을 주기도 한다. 나로서는 그 감동의 이유나 정체성을 온전히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막연하다고 해서 감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사랑이건 욕망이건 파멸이건 회한이건 감동은 논리 이전에 감정이다.
걷잡을 수 없는 회한이 밀려왔다. 하지만 곧 모든 게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침내 스크린에까지 불길이 옮겨 붙었다. 한때 보잘것없던 산골의 한 소녀였던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이룩한 거대한 영화가 눈앞에서 모두 사라지는 것을 비켜보고 있었다. 몸이 점점 따뜻해졌다. 그의 눈앞엔 오래전 그가 고향의 언덕에서 맞이하던 적막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낙조 속에서 마을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언덕엔 바람 한점 불지 않았으며 세상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 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춘희는 조금씩 쉬지 않고 벽돌을 쌓아나갔다. 흙과 불과 물로 빚어낸 벽돌은 공간을 가르고 비바람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온기를 보존하고 공기를 정화해 주는 훌륭한 건축자재였지만 그런 실용적인 쓰임새는 춘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에게 벽돌은 떠나간 사람들을 향한 비밀스런 신호이자 잃어버린 과거를 불러오는 영험한 주술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벽돌을 틀에 넣고 찍어낸 후 아직 구워내기 전의 부드러운 진흙 위에 나뭇가지로 아이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단순하고 서툴렀지만 그녀는 쉬지 않고 아이의 얼굴을 그려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녀는 아이뿐만 아니라 그녀가 알고 있던 사람들, 그녀가 겪은 일들, 언젠가 눈앞을 스쳐간 풍경들을 그림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림은 그녀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벽돌 위에 그림을 그려 구워낸 다음 나란히 늘어놓고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을 보는 동안만큼은 고통과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녀는 벽돌 위에 점점 더 많은 기억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개망초와 뱀, 메뚜기와 잠자리, 고라니 등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상에서부터 대장간의 모루, 벽돌을 실어 나르던 트럭 등 그녀의 인생을 스쳐간 온갖 물상들, 다방의 풍경과 평대 역에서 날뛰던 점보의 모습 등 많은 장면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나도 빨리 사라지고 싶어. 여긴 너무 힘들거든. 그러고 너무 외롭고······
꼬마 아가씨, 너무 엄살 부리지 말라고. 그래도 살아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야.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도 힘든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죽음보다 못한 삶은 없어.
최근에 한 마술동아리에 나가고 있는데 남이 하는 마술에 눈을 부릅뜨고 속임수의 장치나 순간을 잡아내려고 눈을 부릅뜨기보다는 편안한 자세로 마술의 과정과 결과를 단순히 즐기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음을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소설적 성취, 의미, 상징, 분석이니 하는 건 전문가들의 밥벌이로 맡겨두고 일반 독자들이야 우렁차고 맛깔스러운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소설 『고래』는 2004년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았고 2023년 몇 해전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받은 적이 있는 부커상 최종 후보작으로 올랐다. 부커 상 후보 소식으로 19년 만에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나 역시 천명관이란 이름을 잘 알지 못했는데 내게 『고래』를 소개해준 지인은 "영화 <<고령화 가족>>의 원작자"라고 알려주었다. 더운 여름에 좀처럼 책 읽기에 집중하기 힘들다면 『고래』를 권해주고 싶다. 손에 잡고 일단 십여 페이지를 넘기면 , 그 이후론 끝까지 단숨에 가게 될 것이다. 다시 은희경의 말로 마무리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작가는 전통적 소설 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작품에 빚진 게 별로 없는 듯하다. 따라서 인물 성격, 언어 조탁, 효과적인 복선, 기승전결 구성 등의 기존 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작가에게 이 대목이 이 소설에 왜 필요하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야기로서의 위력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결국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약간 거창하게 말해도 된다면, 자신과는 소설관이 다른 심사위원의 동의까지 얻어냈다는 사실이 작가로서는 힘 있는 출발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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