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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H마트에서 울다』

by 장돌뱅이. 2023. 8. 29.

'H마트?'
서점에서 우연히 이 소설을 보았을 때 '혹시 미국의 H마트를 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 바로 설명이 나와 있었다.
(H마트는 미국에 있을 적 전두환 일가의 자금이 투입되어 있다고 소문이 돌아서 기억에 남는다.
사실여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이름 때문에 읽게된 책이다.)


H마트는 아시아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슈퍼마켓 체인이다. H는 한아름의 줄임말로, 대충 번역하자면 "두 팔로 감싸 안을 만큼"이라는 뜻이다.

근데 왜 H마트에서 울까?
마트야 식재료를 사거나 그 안에 입점한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러 오는 곳인데?
백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셀 자우너 (Michelle Zauner)의 자전적인 소설『H마트에서 울다』는 그 물음에 대한 설명이다. 

자우너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지나며 엄마와 관계가 소원해진다. 엄마는 딸의 꿈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우너는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로 가족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평생의 소명으로 삼아 충실하게 살아온 어머니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가 말기 암 선고를 받으면서 자우너는 뼈저린 후회와 함께 절박한 심정으로 엄마와 관계 복원에 나선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자우너는 노력은 계속된다. 소설은 애절한 사모곡이고  추억을 통해 남아있는 사람이 위로를 받고 삶의 좌표를 깨우쳐나가는 이야기이다. 여기까지는 TV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본 상투적인 이야기 같다. 

자우너는 엄마의 삶을 이해하는 연결고리를 음식에서 찾는다. 음식을 먹는 일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이다. 식욕은 본능이지만 그 본능을 채워가는 방식은  각자가 속한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양한 요소'들의 가장 강력한 원천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엄마에게서 시작된다. 

음식은 엄마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엄마는 겉으로 보기엔 지독한 잔소리꾼이었지만 ―자신의 억지스러운 기대에 부응하도록 나를 끊임없이 몰아붙였던 탓에―내 입맛에 꼭 맞춰 점심 도시락을 싸주거나 밥상을 차려줄 때만큼은 엄마가 나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를테면 듣기 좋은 말이나 끊임없이 지지하는 말을 해주는 식이 아니라, 상대가 좋아하는 걸 평소에  잘 봐두었다가 그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편안하게 배려받는 느낌을 받게 해주는 식이었다. 엄마는 누군가 찌개를 먹을 때 국몰이 많은 걸 좋아하는지, 매운 걸 잘 못 먹는지, 토마토롤 싫어하는지, 해산물을 안 먹는지, 먹는 양이 많은 편인지 어떤지를 시시콜콜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제일 먼저 무슨 반찬 접시를 싹 비우는지를 기억해 뒀다가 다음번엔 그 반찬을 접시가 넘치도록 담뿍 담아서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만드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갖가지 다른 음식과 함께 내어놓는 사람이었다.

나는 지난 5년 사이 이모와 엄마를 모두 암으로 잃었다. 그러니 내가 H마트에 가는 것은 갑오징어나 세 단에 1달러짜리 파를 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두 분에 대한 추억을 찾으려고 가는 것이기도 하다. 두 분이 돌아가셨어도, 내 정체성의 절반인 한국인이 죽어버린 건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런 내게 H마트는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기억,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뼈만 남은 엄마의 몸과 하이드로코돈(마약성 진통제) 복용량을 기록하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 대신 두 분이 그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떠올리게 해준다.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 고리 모양의 달콤한 짱구 과자를 열 손가락에 끼고 흔들어대던 모습, 한국 포도를 먹을 때 껍질에서 알맹이만 쪽 빨아먹고 씨를 호 뱉는 법을 내게 가르쳐주던 모습을.

자우너에게 음식은 엄마와 나누었던 '무언의 언어이며, 서로에게 돌아오는 일, 유대, 공통 기반의 상징'이었다. 소설에 유난히 음식과 음식을 먹은 장소와 식재료가 많이 나오는 이유일 것이고, 자우너가 H마트에만 가면 우는 이유일 것이다.

신라면, 떡국, 마늘, 찐만두, 만두피, 계란장조림,  동치미, 참기름, 된장찌개, 삼겹살, 미역국, 죠리퐁, 뻥튀기, 해물 짬뽕, 새우, 홍합, 멸치볶음, 오이소박이, 비빔밥, 숙주나물, 탕수육, 볶음밥, 짜장면, 물냉면, 삼계탕, 떡볶이, 설렁탕, 고추장, 군밤, 노량진수산시장, 전복, 가리비, 해삼, 방어, 문어, 킹크랩, 산낙지, 초고주장, 굴, 육회, 마른오징어, 순대, 콩밥, 콩나물, 간장게장, 깻잎조림, 유산슬, 순두부, 해물파전, 양념갈비, 총각김치, 명란, 짜파게티, 김밥, 김밥꽁다리, 콩국수, 약식, 잣죽, 미숫가루, 누룽지, 팥빙수, 광장시장, 빈대떡,  칼국수, 자갈치시장, 활어회, 귤, 낙지볶음, 흑돼지구이, 통닭, 치맥, 돈가스, 고구마튀김, 겉절······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손바닥을 짝 펴서 거기에 상추 한 장을 올려놓고 내 식대로 음식을 착착 쌓았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갈비 한 조각, 따끈한 밥 한 순가락. 쌈장 약간, 얇게 저민 생마늘 한 조각을 차례차례로. 그런 다음 그걸 암전하게 오므려 입에 쏙 집어넣고는 눈을 감고 우적우적 씹으면서 맛을 음미했다. 몇 달 동안 집밥에 굶주린 내 혀와 위는 그제야 깊은 만족감을 되찾았다. 밥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운 재회였다. 밥솥에서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은 밥알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내가 기숙사에서 생존을 위해 먹던 찐득한 즉석밥과는 차원이 달랐다. "맛있어?" 엄마는 김 봉지를 뜯어 내 밥그릇 옆에 놓았다. '진짜 맛있어!" 나는 입안에 아직 음식이 반쯤 남은 상태로 연방 쓰러질 듯한 시늉을 하면서 대답했다. 엄마는 내 뒤 소파에 앉아, 내가 걸신이라도 들린 듯이 어귀어귀 먹는 동안 얼굴 쪽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어깨 뒤로 걷어주었다. 내 몸에 닿는 엄마 손길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모녀의 모습이 따듯하다. 자우너는 엄마와 추억 속에 존재하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보기로 한다. 유튜브를 보며 된장찌개와 잣죽, 칼국수와 돈가스 등을 거쳐 마침내 '궁극의 요리'인 김치에 도달한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치유법이었다. 오래된 김치는 찌개나 전이나 볶음밥에 넣어 먹고, 새로 담근 김치는 반찬으로 먹었다. 내가 먹을 양보다 더 많이 김치를 만들었을 땐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 나는 엄마가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주야장천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너한테서 항상 김치 냄새가 날 거야. 그 냄새가 네 땀구멍으로 배어 나올 테니까. 

내가 한 음식은 모두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각각의 향과 맛이 잠깐이나마 나를 멀쩡했던 우리집으로 데려다주었다.
(···) 내 기억을 곪아터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트라우마가 내 기억에 스며들어 그것을 망처 버리고 쓸모없게 만들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 기억은 어떻게든 내가 잘 돌봐야 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공유한 문화는 내 심장 속에, 내 유전자 속에 펄떡펄떡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그걸 잘 붙들고 키워 내 안에서 죽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엄마가 가르쳐준 교훈을, 내 안에, 내 일거수일투족에 엄마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를 언젠가 후대에 잘 전할 수 있도록. 나는 엄마의 유산이었다. 내가 엄마와 함께 있지 못한다면 내가 엄마가 되면 될 터였다.

자우너의 마지막 깨달음이 다소 고루해 보이지만 먼 외국에서 언어와 문화, 외모에서 오는 차별 등의 장벽을 넘어서야 하는 이민자 2세의 홀로서기라면 이해해 줄 수 있겠다. 소설에도 나오는 '인간은 곧 그가 먹는 것'이라는 말은 독일 철학자 포이어바흐의 말로 나는 기억한다. 음식은 인간 생존의 육체적·정신적 바탕이다. 음식을 먹는 것은 한 개인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소설 속 자우너에게는 더욱 그래 보인다.

아내가 보름 넘게 한약을 먹었다. 한약을 먹는 동안 매운 음식과 밀가루 들어간 음식 등을 멀리해야 했다. 술과 커피는 물론이었다. 먹지 말라면 더 먹고 싶어지는 법이다. 가끔씩 지키지 않아도 큰 사단이 날 것 같지는 않아서 유혹을 해보았지만 '범생이' 태생인 아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고생한 아내의 해방을 위해 어제 저녁엔 매운 오징어볶음에 막걸리를 준비했다. 

앞으로 당분간은 금기사항에 대한 '보복성(?) 음식'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찍어둔 사진에서 맵거나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위주로  찾아보았다. 라면도 당연히 그중의 하나다. 잘 먹는 게 잘 사는 일이다. 아무거나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몸의 상태는 축복이고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보험이다.

두부김치볶음
닭불고기
매운콩나물볶음
순두부찌개
오이양파무침
김치볶음밥
비빔국수
깻잎전
해물수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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