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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행복은 습관이다

by 장돌뱅이. 2023. 10. 4.

항저우 아시안 게임 우리나라와 쿠웨이트의 축구 예선 경기가 열리는 시간에 나는 아내와 넷플릭스를 보았다. 중학생 이후 국가 대표팀의 축구 경기가 있는 걸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보지 않은 건 아마 처음인 것 같다. 이번 아시안 게임을 위한 선수 선발 과정이나 연습 경기에서 보여준 축구협회와 감독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지지부진한 끝에 겨우 이기기는 할 것이라고 예상을 해보며 일부러 90분 동안 답답함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최근에 스포츠 경기에 대한 관심이 조금 떨어진 이유도 있다.)

영화가 끝나 경기 결과를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니 놀랍게도 9:0의 대승이었다.
'뭐야 이거?' 싫지 않은 궁시렁을 반복하며 하이라이트로 편집된 골 장면을  뒤늦게 찾아서 봤다.
예선 두 번째 경기인 태국전은 4:0이었다. 손자들과 놀아야 해서 후반전에 잠깐 텔레비전을 켤 수 있었지만 골은 모두 전반전에 들어가 골 장면을 볼 수 없었다. 3차 예선전인 바레인 전은  '손자 free'인 시간이라 처음부터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모처럼 내가 직관을 하니 골이 터지지 답답함이 이어졌다. 이미 16강 진출이 확정된 상태라 긴장감이 떨어진 경기이기도 해서 채널을 돌리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3:0이었다. 후반 중반 이후 3골이 들어간 것이다.
결국 나는 예선 16골 중 단 한골도 직관하지 못했다.

16강 토너먼트부터는 시청하기로 했다. 전반 초반 2골을 몰아쳐 오늘도 대량 득점을 하나 했더니 터무니없는 우리 편 실수로 한골을 헌납한 뒤론 후반 중반까지 경기가 지지부진해져 갔다.
'그러면 그렇지 ······ 개발에 땀난 예선 전이었던 거지. 답답축구 어디 가겠나······'
경기 시청을 포기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러 갔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니 불과 10분 사이에 3골이 들어가 경기는 5:1이 되어 있었다. 아내가 혀를 찼다.
"좀 진득하게 기다리지."

기아와 두산의 잠실 경기

이상하게 최근에 내가 직관을 하는 경기마다 응원하는 팀이 수난을 겪었다. 8월 승승장구로 리그 2위까지 올라설 것 같은 기아 타이거즈 경기를 보러 잠실 야구장엘 갔더니 9연승이 멈추고 그 뒤론 '날개 없는 추락'을 하고 있다. 응원팀인 프로축구 FC서울의 8월과 9월 성적은 2승 4 무 2패인데 하필 내가 본  경기에서 2패를 당했다. 경기가 끝나기 직전 '극장골'을 먹고 비기기도 했다. 

내가 보면 진다? 내가 보면 골이 안 들어간다?
이쯤 되니 8강에서 맞붙는 중국을 앞두고  징크스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한국 축구를 위해서 당신이 경기를 보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아내가 놀렸다.

옛날에 산길을 떠날 때면 여자의 살내가 스민 속적삼 한쪽을 가위로 오려 들고 가면 호환을 막을 수 있고, 신라 시대 처용의 그림을 붙이면 나쁜 귀신이 피해를 피할 수 있다는 풍습이 있었다. 비과학적인 보호책이지만 징크스란 게 원래 정체를 알 수 없는 생의 불안의 원인을 찾거나 극복하려다 나온 궁여지책 아닌가. 첨단 문명의 요즘도 시험 볼 때 미역국을 안 먹는다는 속설이 힘이 발휘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의 과반수 이상이 부적을 가져본 경험이 있고 그중 30%는 부적의 힘을 믿는다는 조사도 있었다. 어쩌면 인간이 이룩한 문화와 문명의 바탕에는 이런 불안도 있지 않았을까?

논리적으로는 냉철하게 주어진 상황을 분석하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어떤 재난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징크스를 극복하는 길이겠다.
거기에 나는 행복했던 기억도 힘이 된다고 믿는다.
도박 중독자들은 더 많은 실패의 기억보다 어쩌다 있었던 낮은 확률의 성공을 더 짜릿하게 기억한다고 한다. (예가 좀 적절하지는 않았지만) 삶의 위로와 행복도 그런 '중독'과 습관에서 오지 않을까?
자주 이유 없어도 행복해지는 것. 행복했던 기억을 회상해 보는 것.
타이거즈는 여전히 프로야구 최다우승팀이고, FC서울은 12개 팀 중에서 5위를 유지하고 있다. 상위 몇몇 팀과는 승점 차이가 미미해서 내년에는 아시아 참피언스 리그에서 어쩌면 호날두의 사우디 팀과 붙을 수도 있다. 한국 축구? 우리 모두는 2002년 월드컵 4강이라는 황홀경을 자산으로 갖고 있다.

2002년 월드컵 4강

중국 전 중계를 직관했다. 징크스는 없었다. 결과는 행복했다. 
오늘 저녁엔 우즈베키스탄과 4강 전이 있다. 손자 친구도 경기를 볼 것이다.
행복한 승리를 예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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