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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저물녘

by 장돌뱅이. 2023. 10. 20.

옛 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건강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화제에 오른다. 한때 돌멩이도 소화시켰다던 시절의 과장된 기억을 자주 들먹이다가, 한번 이야기가 터지면 삐걱이는 관절과 침침해진 시력, 흔들리는 이(齒牙), 높은 혈압, 콜레스테롤, 당뇨까지 가히 종합병동에 들어서곤 한다. 

건강 푸념이 끝나면 대개 뭐 하며 지내느냐고 묻는 게 순서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친구끼리는 이미 서로의 일상을 잘 알고 있지만 경조사나 송년회 자리에서나 가끔씩  만나는 사이에서는 부담 없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공통된 질문이 된다.

백수가 된 동창들은 은퇴 전만큼이나 다양한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행, 캠핑, 낚시, 등산, 헬스, 마라톤, 서예, 그림, 악기, 연극, 목공예, 봉사, 요리 등등.
쓰임새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이런저런 자격증 취득 자체를 목표로 공부를 한다는 '학구파'가 있는가 하면, 전국의 향교를 직접 찾아보고 내력을 정리하겠다거나 전국의 오일장을 돌며 색소폰 연주 버스킹을 하겠다는 자못 기발하고 스펙터클한 야심을 가진 '광개토대왕파'도 있다.

은퇴 후 목공예를 배운 친구가 만들어 준 호두나무 도마

앞선 글에도 썼듯이 나는 손자저하와 놀기 위해 시작한 일들로 지금은 많은 시간을 보낸다.
바로 그림과 마술(魔術)이다. 동아리를 만들어 정기적인 모임도 갖고 있다.
나이가 들면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은 '집단욕'이 강해진다고 하던가.
나는 그 '집단욕'을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유유상종(類類相從)' 하며 해소하고 있는 중이다.

그림은 어반 스케치.
말 그대로 도시의(Urban)의 풍경을 그리는(Sketch) 일이다. 여행 중 만나는 풍경을 사진 대신에 나만의 감성을 담아 빠르게 그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펜이나 연필, 수채화 등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아무 그림이나 그린다. 아직 나는 초보라 선 하나 긋는 것도 쉽지 않다.
잘 그려야 한다는 욕심부터 버리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손자저하는 마술을 좋아한다. 한번 보여준 마술을 또다시 해보일 수 없어 늘 새로운 걸 찾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마술과 이야기를 접속시켜 흥미를 배가 시켜보기도 한다. 아직 유치한 수준이지만 회원들과 짧은 버스킹도 하고 대외공연도 했다. 내년에는 과감히 봉사 활동도 해보자고 논의 중이다. 
마술은 눈속임이 아니라 과학이고 연습이라고 우리끼리 낄낄거리곤 한다.

손자저하와 노는 숫자마술

당연히 아내와 함께 '유유상종' 하는 시간이 가장 많다.
아내는 가장 많은 관심사와 취향을 공유하고 있는 '인생 동아리 회원'이다.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공원과 강변을 걷는다.

*이전 글 : 경복궁의 현판 1

 

경복궁의 현판 1

경복궁은 조선 초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뒤 맨 처음 지은 궁궐이다. '경복(景福)'은 '큰 복'이라는 뜻이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따르면 한양 천도를 주도한 정도전은 '술은 이미 취하였고(

jangdolbange.tistory.com

올해부터 아내와 시간이 나는대로 서울에 있는 고궁을 찾아다니며 전각마다 붙어있는 현판과 주련을 읽어보고 있다. 옛사람들이 건축물에 부여한 정체성과 소망을 엿보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한문 실력이 부족한 탓에 옛 경전과 각종 고전에 바탕을 둔 그 글자들을 자력으로 독해할 수는 없다. 이런저런 책들의 도움을 받는다. 아내와 건물의 처마 그늘에 앉아 해설서를 번갈아 가며 읽는 기분은 한가롭다.
당대 최고의 명필들이 썼을 현판과 주련의 글씨는 아내의 서예 공부에도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내는 초급자인 자신에게는 언감생심 터무니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아내와 걷는 산책길 풍경
문어미나리무침
미더덕찜

어느 일이나 꼭 해야 하는 필요나 달성해야 할 성취 목표가 있을 리 없다. 
그냥 좋아서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자체가 계획이고 목표다. 긴장과 경쟁에서 자유로운 취미는 즐거움을 넘어 작은 행복을 선물한다. '말없이 젖으며 행과 행 사이가 혼곤해지는' 게 저물어가는 일이라지만 나는 저물녁의 나이가 가져다주는 이 느슨함과 헐렁함이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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