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달에 갈 수 있다는 듯이

by 장돌뱅이. 2023. 10. 16.

다시 손자 친구들과 보낸 며칠.
매번 그랬듯이 2호와는 "로보카 폴리, 로이, 앰버, 헬리"와 함께 수시로 집에 침입하는 도둑을 잡고, 거실과 방마다 번갈아 나는 불을 끄고, 다친 사람들을 병원으로 실어 나르며 긴박하게(?) 보냈다. 한글용사 아이야와 텔레토비를 좋아하던 2호는 요즘 주제가도 따라부를 정도로 "로보카 폴리"에 빠져 있다. 조만간 "최강전사, 미니특공대"로 관심사가 옮겨 갈 것도 같지만.

실내놀이가 루스해지면 밖으로 나갔다. 자전거를 타고 미끄럼틀을 타고 그네를 탔다.
어린이집 행사로 영문도 모르는 채 입어야 하는 할아버지 세대의 교복과 개그맨 임하룡 스타일의 빨간 양말은 싫어하지만 경찰복은 좋아했다. 어느 옷을 입었건 미끄럼틀에서 내려올 때 뒤에서 나를 들이박으며 까르륵까르륵 고개를 젖히고 넘어갔다.
2호의 웃음소리가 맑은 공기를 타고 집에서 일을 하는 아내에게까지 들렸다고 한다.

1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레고 조립에 공을 들이고 바둑과 장기 같은 게임과 마술에 관심이 많아졌다. 나는 늘 그랬듯이 1호를 곤경에 몰아넣고 고민하는 표정을 즐기다가 슬그머니 역전을 당하는 장기를 두었다. (1호는 근래에 들어 할아버지가 일부러 져주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는 것 같다.)
그리고 신문지로 별과 하트들 만들거나 조각을 맞추는 마술을 보여주었다.
1호는 내게 비법을 알려달라고 졸라선 금세 할머니와 부모 앞에서 기세등등 시연을 했다.

할머니가 차려준 만둣국이 입맛에 맞았는지 두 그릇을 먹고도 밤참으로 한밤중에 한 그릇을 더 먹고서야 1호는 잠자리에 들었다. 건넌방에서는 2호가 엄마에게 잠투정을 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함께 자는 1호는 무수한 질문을 쏟아내다가 잠이 들었다. 하느님은 어디 있냐고, 없는 거 아니냐고 묻기도 하고( 이제 연말에 산타할아버지를 들이대며 착한 어린이 코스프레를 강요하는 건 실효성이 없을 듯하다), 들어본 적도 없는 과부독거미와 일본여우가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렇게 요란스럽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하지만 잠든 친구들 옆에서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며 복기를 해보면 더없이  평온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곤 했다.

왜, 아 말해주세요, 왜
해는 이제 지는 걸까요?
자거라, 아가야, 포근히 꿈을 꾸렴.
어두운 밤 때문에 그럴 거야,
그래서 해가 지는 거겠지.

왜, 아 말해주세요, 왜

우리의 도시는 이토록 조용할까요?
자거라, 아가야, 포근히 꿈을 꾸렴.
어두운 밤 때문에 그럴 거야,
그때면 도시는 잠들고 싶어한단다.

왜, 아 말해주세요, 왜
등불은 이렇게 타오르는 걸까요? 
자거라, 아가야, 포근히 꿈을 꾸렴.
어두운 밤 때문에 그럴 거야,
그래서 등불이 밝게 탄단다.

왜, 아 말해주세요, 왜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가는 걸까요?
자거라, 아가야, 포근히 꿈을 꾸렴.
어두운 밤 때문에 그럴 거야,
그래서 손에 손을 잡고들 간단다.

왜, 아 말해주세요, 왜
우리의 심장은 이렇게 작을까요?
자거라, 아가야, 포근히 꿈을 꾸렴.
어두운 밤 때문에 그럴 거야,
그때면 우리는 아주 외롭단다.

-볼프강 보르헤르트, 「저녁의 노래」-

친구들은 앞으로 어떤 시간 속을 어떻게 걸어가며 살게 될까?
핸드폰 뉴스 속 세상은 살벌한 증오와 분노, 끔찍한 폭력과 파괴, 살상의 기사들로 넘쳐난다. 우리가 함께 보낸  평범하고 평온한 시간이 계속될 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런 세상 속에 살아가라고 저 작고 여린 얼굴과 몸, 손과 발을 함부로 던져놓은 것은 아닐까 미안하고 안쓰러워지기도 한다.  

최근에 읽은 책은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이라는 인식을 거부했다.
그럴 때 기억은 과거의 경험일 뿐이지만 기억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로 확장한다면, 미래에 대해 내가 갖는 기억(상상 혹은 믿음)에 따라 현재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을 일이 달라질  거라고 했다.

새로운 바람은 새로운 감각을 불러온다. 그 감각을 통해 우리의 몸과 세계는 동시에 새로 태어난다.

- 김연수의 소설,「비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중에서 -

친구들을 위해, 친구들과 함께 어떤 미래를 기억해야 할까? 기억에 따라 지금 일어날 일과 일어나지 않을 일이 달라질 수 있을까?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던가?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 김연수의 소설,「사랑의 단상 2014」중에서 -

사랑이란 기억을 놓지 않으려면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달까지는 갈 수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 있다고' 책은 말했지만.


*김연수의 단편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을 읽고 나니 "동네북"에서 10월 독서토론 책으로 선정했다.
읽긴 읽었는데 무슨 내용이었지? 단편적인 부분 외에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중학교 때 읽은『마담 보바리』가 엊그제 읽은 어떤 책보다 기억에 걸러진 것이 많은, '단기 기억 삭제증'의 초기 단계인 탓이다. 
다시 한번 읽을 수밖에 없었다. 생소한 듯 낯익은 내용, 그리고 다른 느낌 - 부득불 경험하게 되었지만 '책은 세 번 읽으라(書三讀)'라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혼 39주년  (2) 2023.10.28
저물녘  (1) 2023.10.20
그녀가 말했다.  (0) 2023.10.08
가을 꽃게  (0) 2023.10.06
행복은 습관이다  (0) 2023.10.0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