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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겨울방학

by 장돌뱅이. 2024. 1. 11.

어릴 적 어른들은 아이들의 방학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방학이라면 그냥 학교가지 않는 날이 계속되며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잘 알아서 노는 시간이었다.
방학이라고 해서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이벤트 같은 걸 준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쩌다 친척집에 다녀오는 운이 좋은 친구들이 몇 명 있을 뿐이었다.

요즈음 세상에는 그렇게 아이들을 방치하듯 키우는 부모는 거의 없다.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들로 산으로 쏘다니는 대신에 부모가 준비한 학원이나 취미활동, 여행 등을 다니며 보낸다. 
손자저하 1호가 겨울방학을 맞았다. 여름방학과 달리 (봄방학도 없이) 2달이나 계속된다.
이번 방학 동안 저하는 우리 집으로 와서 나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학교 다닐 때보다 여유로워진 시간을 대체할 방안이 많지 않은 것이다.
예전엔 그냥 밖에 나가기만 하면 늘 친구들이 있어 문제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저하가 요즘 재미를 들이고 있는 바둑과 장기를 우리 집에도 한 세트 준비했다. 방과 후 교실에서 이제 포석과 행마를 배우기 시작한 저하의 실력은 아직 초보다. 내가 뜻대로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거세게 몰아부쳐 저하를 곤혹스럽게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내 쪽이 허물어지는 식으로 판을 운영한다. 물론 저하는 자기가 나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불리하던 판세를 뒤집은 것으로 의기양양해한다.

그런데 서양 장기인 체스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저하는 작년 말 필리핀 세부를 여행하면서 묵었던 리조트에서 체스를 배웠다. 그곳에서 단지 몇 판을 두어본 초보일 뿐이지만 말을 움직이는 방법도 모르는 나에게는 고수로 군림했다. 저하는 나에게 말을 움직이는 방법만을 초고속으로 설명한 뒤에 생각할 틈도 없이 나의 진영을 초토화시키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곤 했다.

하는 수 없이 나도 체스를 사서 유튜브와 책을 보며 공부해야 했다.
책을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 저하와 대등하게 체스를 둘 수 있었다.
기세등등하던 저하의 실력은 사실 그렇게 허약한 것이었고 저하가 나에게 알려준 규칙도 알고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하루 사이에 고수의 자신감에 위협을 받은 저하는 끙끙거리며 당황스러워했다.
일단 게임을 읽을 수 있어야 드라마틱하게 져줄 수도 있는 일이다.
겨울방학 동안에 저하와 함께 체스에 몰두해 볼 생각이다.

방학 동안 저하와 보내는 일은 나에게도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즐거움일 것이다.
보드게임도 몇 가지 준비했다. 박물관과 과학관에서 체험활동도 해보려고 한다. 여행도 갈 것이다.
하지만  또래의 친구들을 학원이나 운동클럽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세상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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