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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by 장돌뱅이. 2024. 1. 12.

『How Democracies Die』은 도널드 트럼프 집권 초기에 발간되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함께 썼다. 
날마다 전해지는 뉴스가, 뉴스에서 그려지는 미래가 두렵기만 한 요즈음, 그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책의 일부를 발췌 인용해 본다.

2016년에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직 경험이 전혀 없고,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존중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 독단적 성향이 뚜렷한 인물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혹은 군부 통치와 같은 노골적인 형태의 독재는 전 세계적으로 점차 종적을 감추고 있다. 최근에는 군사 쿠데타를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의 폭력적인 권력 장악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국가가 정기적으로 선거를 치른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다른 형태로 죽어간다. 냉전이 끝나고 민주주의 붕괴는 대부분은 군인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이뤄졌다.

많은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전복 시도는 의회나 법원의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합법적'이다. 심지어 사법부를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부패를 척결하고, 혹은 선거 절차를 간소화한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개선'하려고까지 한다. 신문은 똑같이 발행되지만, 정권의 회유나 협박은 자체 검열을 강요한다. 시민들은 정부를 비판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 세무조사를 받거나 소송당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 혼란을 불러온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깨닫지 못한다. 이들은 여전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경우 쿠데타나 계엄령 선포, 혹은 한정 질서의 중단처럼 독재의 '경계를 넘어서는' 명백한 순간이 없기 때문에 사회의 비상벨은 울리지 않는다. 독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장이나 거짓말을 한다고 오해를 받는다. 사람들 대부분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민주주의 기반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극단주의 선동가는 어느 사회에서나 등장하기 마련이다. (···)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시험은 이러한 인물이 등장하는가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와 정당이 나서서 이러한 인물이 당내 주류가 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이들에 대한 지지와 연합을 거부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당의 민주주의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경쟁 세력과 적극적으로 연대함으로써 이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가이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극단주의자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성 정당이 두려움과 기회주의, 혹은 판단 착오로 인해 극단주의자와 손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제도만으로는 선출된 독재자를 실질적으로 제어할 수 없다. 정당 체제와 시민사회는 물론 민주주의 규범(democratic  norm)이 필요하다. 그 규범이 무너질 때 헌법에 명시된 권력분립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민주주의 보호막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독재자는 민주주의 제도를 정치 무기로 삼아 마음껏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선출된 독재자는 사법부를 비롯한 중립 기관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거나 '무기로 활용하고', 언론과 민간 영역을 매수하고(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정치 게임의 규칙을 바꿔서 경쟁자에게 불리하게 운동장을 기울인다.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의 시나리오에서 가장 비극적인 역설은 그가 민주주의 제도를 미묘하고 점진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합법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죽인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돌아가고 오랫동안 이어지기 위해서는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헌법을 뒷받침해야 한다. 지금까지 두 가지 기본적인 규범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미국 사회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 왔다. 그 두 가지 규범이란 정당이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과 이해(understanding), 그리고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forbearance)를 말한다.

이제는 미국 민주주의의 가드레일이 흔들리고 있다. (···) 민주주의 규범 침식은 당파적 양극화에서 비롯되었다. 그 양극화는 정책의 차이를 넘어서, 인종과 문화에 걸친 본질적 갈등으로까지 뻗어 있다. 미국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인종 간 평등을 실현하려는 사회 노력은 교묘한 전략에 직면했고, 오히려 양극화를 심화했다. 민주주의 붕괴에 관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양극화가 민주주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지금 그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두려움, 혹은 분노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없다. 우리는 겸손하면서 동시에 용감해야 한다. 경고신호를 인식하고 위험한 신호를 가려내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배워야 한다. 또한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를 파멸로 몰아갔던 치명적인 실수를 인식하고, 다른 나라의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에 맞서 어떻게 저항했는지, 그리고 민주주의 붕괴를 막기 위해 어떻게 뿌리 깊은 양극화를 극복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에는 패턴이 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너무 늦기 전에 그 패턴을 발견해 내는 일이다.


*이전 글 참조 : 
2020.11.03 

 

'꽃'만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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