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 봄이 여기저기서 '클릭 클릭'을 시작했다.
손자저하들과 보내다 잠깐 주어진 휴식의 시간.
"혹시 도다리쑥국을 시작하셨나요?"
때가 너무 이르지 않을까 전화로 조심스레 식당에 물었더니 이미 개시했다고 한다.
따뜻한 겨울 날씨 덕에 봄쑥이 일찍 나왔나 보다.
해마다 이른봄이면 을지로에 있는 식당 충무집에서 도다리쑥국을 먹는다.
아내와 함께 하는 봄맞이 행사 중의 하나다.
봄이면 통영 땅 남도 천리로 가
갯 처녀의 비린 향기가 나는
도다리쑥국을 홀린 듯이 먹는다.
해수 쑥탕에 누워
목욕하고 있는
도다리 살맛이라니
- 장우식, 「도다리쑥국」 중에서 -
인용한 시는 좀 비릿하고 에로틱하지만 정작 도다리쑥국은, 된장과 쑥과 도다리가 제각각 그리고 합쳐져, 그윽하고 정갈한 맛을 냈다. 함께 먹는 멍게밥에도 유독 봄맛이 진하게 들어 있는 듯 향긋했다.
식사를 하고 서울도서관으로 갔다.
집에 읽을 책이 계획에 밀려 있음에도 눈에 보이는 욕심을 뿌리치지 못해 한 권을 빌렸다.
올 우리나라 살림에 (작은) 도서관 예산이 삭감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작은 도서관들이 문을 닫을 위험에 처해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런 상황에 서울 시내에는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짓는다는 생뚱맞은 소식도 있다.
최대 규모? 글쎄 ······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최대·최고의 화려한 도서관 하나 보다는 동네에 있는 아담한 도서관 여러 개가 더 나은 것 아닐까?
이번 정권이 하는 짓은 어찌 이리 하나 같이 '꼼꼼하게' 한심할까?
게다가 특정 단체가 일부 도서에 대한 이용 제한과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책을, 어떤 기준으로, 누가 선별하고 검열을 하겠다는 것일까?
유신독재 시절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 이상 정부의 공식적인 지침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세상엔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것이고, 누군가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통념과 관습, 나아가서는 합법을 흔드는 위험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서관은 언제나 "위험한 아이디어를 탐색하는 안전한 장소"여야 하지 않을까?
서울도서관 앞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서 잠시 묵념을 하고 길을 건너 세실극장의 옥상인 세실마루에 올랐다. 성공회 성당과 덕수궁 그리고 서울 시청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없어 한가한 옥상 전망대에서 아내와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오래 서성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
세실마루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영국대사관 옆으로 좁게 난 길을 따라 빠져나가면 아관파천의 역사적 장소인 흰색의 옛 러시아공사관과 만난다.
러시아공사관을 나와 정동길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걸으면 길 좌우로 이화여고, 옛 신아일보 별관, 정동극장, 정동제일교회, 서울시립미술관이 이어진다.
덕수궁 일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희비극이 집약된 곳이다.
아픈 역사만 회상하지 않는다면(그러긴 쉽지 않지만) 덕수궁 돌담길은 언제 걸어도 예쁘다.
대중가요에도 자주 등장하여 7080의 감미로운 추억을 불러오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걷는 연인은 헤어진다는 속설도 이젠 유효기간이 지난, 낡은 7080의 흔적일 뿐이다.
수십 번 걸은 아내와 내가 건재하지(?) 않은가.
때론 사랑이 시들해질 때가 있지
달력 그림 같은 창밖 풍경들도 이내 무료해지듯
경춘선 기차 객실에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다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든 그 설렘도
덕수궁 돌담길 따라 걷던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떨림도
북촌마을 막다른 골목 가슴 터질듯 두근거리던 입맞춤도
그냥 지겨워질 때가 있지
그래서 보낸 사람이 있지
세월이 흘러 홀로 지나온 길을 남몰래 돌아보지
날은 어둡고 텅 빈 하늘 아래 드문드문 가로등불
오래된 성당 앞 가로수 길에 찬바람 불고
낙엽과 함께 뒹구는 당신 이름, 당신과의 날들
빛바랜 누런 털, 눈물 그렁그렁한 선한 눈망울
영화 속 늙은 소 같은 옛날 사람
시들하고 지겨웠던, 휴식이고 위로였던 그 이름
늘 내 안에 있는 당신
이제 눈물을 훔치며 무릎을 내미네
두근거림은 없어도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 곽효환, 「옛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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