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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다시 찾은 SK나이츠

by 장돌뱅이. 2023. 12. 4.

손자저하와 함께 다시 SK나이츠의 경기를 보러 잠실학생체육관을 찾았다.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두고 두 번째 오니 경기장 분위기와 응원가도 한결 익숙하다.
저하도 그러했는지 앞장서서 입구로 나를 잡아 끈다

국민의례 때 태극기 옆에 걸린 문경은과 전희철의 이름이 적혀 있다.
90년 대 초 인기몰이를 했던 "농구대잔치"에서 쟁쟁했던 스타들이다.
프로에 와서도 여전했던 모양인지 각각 영구결번이라는 영예를 얻은 것 같다. 
전희철은 지금 SK나이츠의 감독이다.
198cm이라는 큰 키에 짙은 회색  양복을 입고 사이드라인에 서있는  맵시가 도드라져 보였다.

야구와 축구와 달리 실내 경기인 농구는 선수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현장감과 관람 집중도가 높다.
경기의 박진감이 생생하기도 하지만, 경기가 멈추는 시간마다 치어리더의 응원과 게임 등으로 잠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농구 경기 시간은 40분(10분x4쿼터), 거기에 브레이크 타임이 있어 보통 1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데 언제 갔는지 모르게  순식간에 지나간다.

서울 SK나이츠와 안양 정관장의 경기는 엎치락뒤치락 한 끝에 SK가 85대 71로 이겼다.
현재 SK는 10개 팀 중 4위이다.  

어른들과 달리 지루할 수도 있을 텐데 저하는 싸 가지고 간 통닭을 먹으며 경기에 집중했다.
사진을 찍으려 할 때마다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이상한 포즈를 취하는 장난도 멈추지 않았다
반칙에 대해 관심을 보여 가장 흔한 손을 치는 파울을 말해주었다. 양 팀 골대 아래 다른 색깔로 그려진 제한구역과 공격할 때 그곳에 3초 이상 계속 머무를 수 없는 '3초룰'도 알려주었다.

경기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내게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손자저하다.
저하는 어린아이 특유의 발랄함으로 늘 부산하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계단으로 내려가고 계단은 걷지 않고 뛰어서 오르내린다. 아파트에서도 그렇고 지하철 역에서도 그렇다. 나는 올라갈 때는 뛰어서 올라도 내려갈 때는 걸어가라고 한다. 저하는 왜요?라고 묻는다. 저하에게 세상은 호기심천국이다.
왜요? 왜요?
··· 저하의 물음에 나는 가급적 저하의 언어로 대답하려고 애를 쓴다.


농구를 보러 지하철 역까지 걸어갈 때 저하가 물었다.
"할아버지 아파트는 왜 이렇게 낡았어요?"
"지은 지 오래되어서 그렇지." 
무심한 대답에 저하는 거침없이 나의 경제적 무능을 꼬집는 직격탄을 날렸다. 
"할아버진 돈도 많이 벌었을 것 같은데 왜 이런 데서 살아요?"
자기가 사는 아파트의 널찍한 크기와 세련된 외관이 이제 비교되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허를 찔린 나는 '손님 당황하셨어요'가 되어 버벅거렸다.
"응?··· 저기··· 그게 오래되어서··· 다시 지을 건데··· 그러면 좋아지겠지?"
순간적으로 '어디서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얼마나 행복하게 사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상투적인 고답(高踏)을 가장해 볼까 했지만 틈을 주지 않는 저하의 자못 어른스러운 끄덕임에 막히고 말았다.
"뭐, 다시 지으면 당연히 좋아지긴 하겠죠."
('좋아지긴 하겠죠?' 해석에 따라 많은 의미가 들어있을 것 같다.)

살다 보면 가끔씩 "너는 네 청춘으로 대체 무엇을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내도 비슷한 질문과 질책을 담은 눈흘김을 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내 청춘으로 부지런히 당신 쫓아다녀서 저런 손자가 태어났잖아! 그럼 됐지 뭘 더 바래?"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축제가 될 것이다.
길을 걸어가는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날아오는
꽃잎 선물을 받아들이듯
하루하루가 네게 그렇게 되도록 하라.
꽃잎을 모아 간직해 두는 일 따위에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제 머리카라 속으로 기꺼이 날아 들어온
꽃잎을 아이는 살며시 떼어내고
사랑스런 젊은 시절을 향해
더욱 새로운 꽃잎을 향해 두 손을 내민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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