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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천국을 등에 업고 지옥불 건너기

by 장돌뱅이. 2024. 3. 13.

우리나라 작년 4분기 합계 출산율이 0.65명대로 떨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연간 출산율은 0.72명이라고 하지만 올해 전체 평균은 0.6명대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기록적인 저출산 현상이라고 한다. '중세 유럽의 흑사병  수준', '국가 소멸'이라는 외국 언론의 평가가 과장돤 수사가 아니라  객관적 평가로 보인다.
지난 모든 정권과 정부가 이 문제 해결에 골몰하였지만 백약이 무효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메데이아는 "아이를 한번 낳느니 방패를 손에 들고 세번이라도 전쟁터에 나가겠노라"고 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개명된 세상이고 육아에 필요한 온갖 편의 기구와 시설이 발달된 세상 아닌가. 그런데 왜 아이를 안 낳으려는 것일까?

힘들고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왜? 어떻게 그렇다는 것일까? 무지렁이인 내가 그 현상을 분석하거나 어떤 혜안을 제시할 순 없지만 초등학교와 어린이집에 다니는 두 명의 손자저하들을 잠시 모시다(?) 보니, 나 역시 지금의 세상에서라면 그다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진다.

초등학교 때 반공도덕에서는 북한 주민들의 참혹한 '실상'을 가르쳤다. '새벽별 보기 운동'으로 강제 노동에 동원되는 부모들이 젖도 안 뗀 아이들을 탁아소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 걷지도 못하는 아주 어린 아이들조차도?' 
그때 어린 나는 탁아소의 허름하고 싸늘한 복도에 울려 퍼지는, 부모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자지러지거나 배가 고파 칭얼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떠올려야 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어린이집을 내가 어린 시절 배우던(상상하던) 북한의 '탁아소'와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을 어디엔가 맡겨야 생활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는 점은 비슷하다.
물론 이런 변화는 여성들의 사회 참여 기회가 커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만 아이들에게는 이런 변화가 어떨까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아이들도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린이집보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걸 좋아할 것이다.

한때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 한바탕씩 법석을 피우곤 하던 2호저하는 이제는 혼자서도 씩씩하게 교실에 걸어 들어갈 정도로 적응이 되었다. 오후에 집으로 데려오며 재미있었냐고 물으면 그랬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대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교실로 들어가겠냐고 물으면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1호도 그 나이 때 똑같았다. 어린이집 창문 너머로 나의 모습이 비치는 순간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그 자리에 놓아버리고 곧바로 뛰쳐나오려고 애를 쓰곤 했다.

어린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출산율을 올리는데 도움이 될까? 모르겠다.

아니 출산율과 상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어린이집 교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로 교사들의 노동강도를 포함한 근무환경과 금전적 대우를 국가가 해줄 수 있는 최고로 올려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젊은 여교사가 손자저하의 용변을 보았다는(받아냈다는) 사실을 적은 알림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고마움에 앞서 송구스러워진다. 

학원 버스를 기다리며 잠깐 장난을 치는 시간 소중할 정도로 초등학생 1호는 바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손자저하 1호와 친구들은 모두 종합 스포츠 맨이고 종합예술인이 되어야 한다.
학교 정규 수업이 끝난 후 맞벌이 부모가 집에 돌아오기까지 '무정부' 상태의 시간을 무언가로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태권도, 축구, 수영, 스케이트, 바둑, 배드민턴, 바이올린, 영어, 수학  따위를 가르치는 방과후교실과 돌봄교실, 그리고 사설학원에서 이를 담당한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아이들을 효율적으로 실어다 주는 서비스는 학원 선택의 필수 고려 사항이다.

'학조부모'가 집에서 부모들을 대신해서 저하들의 귀가를 맞아준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더 나은 생활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 매일 넷플릭스를 보여줄 수도 없고 다양한 예체능을 개인지도 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들이 다들 학원에 가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초등학생들에겐 학교와 학원이 배움터고 오고 가는 버스 안이 놀이터다. 줄넘기도 축구도 전래놀이도 동네 놀이터에서 놀면서 시나브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알게 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이들이 천진난만함으로 복잡하게 옮겨다니는 일상을 즐겁게 소화한다는 점이다. 

저하1호는 어디선가 배운, 바보는 '바다의 보배'이고  천재는 '천하에 재수 없는 놈'이라고 난센스 퀴즈를 내고, '설사똥 카레라이스, 지렁이 스파게티, 후식으로 멸치 똥튀김' 같은 '불량' 노래를 과시하며 낄낄거린다. 학교 다녀오기 무섭게 밖으로 나가 엄마나 누나들이 저녁 먹으라고 찾을 때까지 동네 고샅길을 뛰어다니던 나의 어린 시절과 어느 것이 더 나은지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어린아이들이 몹시 빠듯하게  짜인 시간 속에서 생활하면서도 그런 일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안 돼 보일 뿐이다.  

부모는 부모대로 힘들다. 두 저하의 뒷바라지에 딸아이 부부는 개인 취미생활은 접은 지 오래다.
결혼 전 행글라이더와 마라톤, 그리고 스킨스쿠바의 육해공을 즐기며 다른 모임에도 부지런히 기웃거리던 딸아이에게 지금 남은 오직 생활은 회사와 육아뿐이다. 흔히 말하듯 회사 퇴근이 육아 출근이다. 가사노동을 평등하게 나누어 하고 있는 사위도 그렇다.
1호와 2호의 학교와 학원 시간표와 부모의 회사 일정을 맞추는 일은 미적분보다 어려운 고등수학이다.

어린이집과 방과 후 교육, 돌봄교실과 사교육도 필요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아이들에겐 부모의 직접적인 보살핌과 함께 무언가를 배우는 대신에 그냥 아이들끼리 노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최근에 읽은 책에는 이 시대에 '엄마로 산다는 건 천국을 등에 업고 지옥불을 건너는 것'이라고 했다.
'지옥불'에서 부모와 아이를 동시에 구하는 것 그것이 화급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우선은 육아전담의 시간과 그 시간동안 안정적 수입이 부모에게 최대한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태어난 아이들을 잘 키우는 일에 골몰하면 저출산 문제도 뒤따라 해결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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