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클의 한 선배가 두 권의 소설을 추천해 주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였다.
경제공황기에 집과 땅을 잃고 떠도는 가족을 그린 존 스타인벡의『분노의 포도』는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풍요의 상징으로만 여겨지던 미국의 잔혹사가 충격이었고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안간힘이 감동이었다. 꼼꼼히 읽는데도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다.
문장이 건조했어도 공감은 깊었다.
이와 반대로 『두 도시 이야기』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좋아하는 선배의 권유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면 끝까지 읽지 않았을 것이다. 영상 독서 모임인 <동네북>에서 3월 도서로 선정되어 근 50년 만에 다시 읽어도 느낌은 비슷했다. 스토리와 구성은 복잡하지 않았고, (부분적인 묘사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무난히 읽히는 문장이었다.
그럼에도 뭔가 정서적으로 크게 다가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 이유가 무성영화 시절 변사의 말처럼 장식을 많이 그의 문체에 있는 게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어도 그런 문장은 쉽게 볼 수 있다.
그는 금발 쪽으로 몸을 굽혀 장밋빛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갖다 대고 팔로 그녀를 껴안았다.
그때 어두운 거리를 걷던 어떤 쓸쓸한 방랑자가 그녀의 순한 고백을 듣고, 남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부드러운 푸른 눈으로부터 몇 방울의 동정심이 키스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면, 그는 밤이 깊도록 울었을지도 모르고 ···
『두 도시 이야기』는 1789년 프랑스혁명 전후에 파리와 런던에서 벌어지는 뿌리 깊은 비극과 원한, 복수와 사랑의 이야기다. 지배층의 잔인한 폭정에 짓눌린 민중들의 분노는 마침내 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만들고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존과 사랑을 위해 발버둥친다.
소설 속에서 파리는 인민재판과 단두대가 횡행하는 아비규환으로 그려지고 런던은 그런 혼란에서 자유로운 피안의 세계처럼 그려진다. 소설 첫머리에는 '영국에는 국가적인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질서와 보호랄 것이 없었다'고 했지만 전체적인 내용에서 런던은 안전하고 합리적인 재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산업혁명 이후 다른 유렵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구가한 영국에서 높아진 대중들의 애국적 정서와 활성화된 출판 시장의 독자들을 디킨즈가 의식한 결과라고 한다.
젊은 시절 술자리에서 큰 폭력을 제거하기 위한 폭력은 정당한가에 대해 설익은 토론(?)을, 아니 횡설수설을 주고받은 기억 이 있다. 그때 누군가『두 도시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선배 덕분에 나도 소설에 대해서 한두 마디 거들 수 있었다. 폭력에 대한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어떤 사태를 보는데 이른바 '양비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다. A도 잘못했지만 B도 잘못했다는 식의 회색 이론이라고···
『두 도시 이야기』가 1859년에 출판되어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었는데도 소설의 시각은 내게 양비론으로 비춰진다. 혁명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음을 감안해도 지배층과 민중들이 폭력과 광기에서 거의 동등하게 그려진다. 지배층은 "억압은 유일하게 영속적인 철학이야. 공포와 굴종의 음울한 경의는 앞으로도 개자식들이 채찍에 순종하도록 해줄 테지."라는 오만함으로 갖은 횡포를 저지르고, 거기에 맞선 민중들은 "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그날이 오면, 난 당신과 당신네 족속을 당신의 그 악한 종족의 마지막 사람까지 소환해서 이 모두를 책임지게 할 거야." 라며 '자유 평등 박애'의 명분으로 서릿발 같은 증오의 단두대를 세운다.
프랑스혁명 때 사람들이 불러 현재 국가가 되었다는「라 마르세예즈」의 가사는 살벌하다.
소설의 양비론적 시각과는 달리 프랑스인은 시민들의 혁명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가자, 조국의 아들들이여 영광의 날은 왔나니 압제가 앞에 있지만
피의 깃발이 올려졌나니 피의 깃발은 올려졌나니
들판을 함께 가자 야만적인 적군을 무찌르자
적은 다가오고 있다 우리 아들, 우리 조국의 목을 치기 위해 (중략)
조국의 신성한 수호신이 우리 복수심에 불타는 군대를 보살피고 지켜줄지니
자유, 사랑하는 자유의 신이여 적과 싸우자 적과 싸우자
우리 깃발 아래서, 승리의 노래가 힘차게 울려 퍼질지니
쓰러져가는 적들도 그대의 승리와 영광을 보리라! 우리 군대와 시민의 승리를! (중략)
시민이여! 무기를 들어라 무장하라
전사들이여 전진하라! 전진하라!
적의 더러운 피가 우리 들판을 적시도록!
- 프랑스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 부분 -
디킨즈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는 아놀드 하우저의 글이 도움이 된다.
그는 사회의 여러 죄악, 부자들의 냉혹과 거만, 법의 가혹성과 몰이해성, 어린이에 대한 잔인한 취급, 감옥과 공장과 학교의 비인간적 조건들, 한마디로 모든 제도적 조직체의 속성인 개인적 고려의 결핍에 대해서 불꽃 튀는 어휘로 분노를 터뜨렸다. 그의 고발은 사람들의 귀를 시끄럽게 울렸고, 사회 전체에 부정의 책임이 있다는 불안한 느낌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채웠다. 하지만 고난의 외침과 실컷 울고 난 다음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만족감을 뭔가 보다 확실한 것으로 인도하지는 못했다. 작가의 사회적 메시지는 정치적으로 결실이 없었으며, 그의 박애주의 역시 예술적으로 매우 고르지 않은 결실을 맺었다.(···) 그의 무비판적 인정주의, 자비주의, 소유 계급의 사사로운 선의와 선행이 사회적 결함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은 마지막까지 분석해 본다면 그의 애매한 사회의식에서, 계급들 사이에서 그의 소시민적인 미결정적 위치에서 기원하는 것이었다.
디킨즈는 자기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내적 모순들을 극복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한다. 한편으로 그는 사회에 대해서 지극히 매섭게 비난을 퍼붓지만,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그것을 승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회악의 영향 범위를 과소평가한다. 실제로 그는 "모든 것은 민중을 위해서 ― 그러나 아무것도 민중과 함께 하지 않는다(everything for the people ― nothing with the people)는 원칙을 고수하는데, 그는 민중이란 통치의 능력이 없다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우중(愚衆)>을 두려워하고, 이상적인 의미에서 '민중'이란 중산계층이라고 생각한다.
-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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