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무렵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자주 이야기 된다.
예수가 죽고 난 후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1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때 한 사내가 두 사람과 나란히 걸어가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소식이 깜깜인 사람은 처음 보았다는 투로 사내를 타박하며 사흘 전에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라고 믿었던 예수가 허망하게 죽었고 이제는 예수의 시체마저 없어졌다고 침통해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슬픔과 비탄으로 가득차 다시 곁에 와 있는 부활한 예수를 알아볼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내는 성경 속에 숱하게 언급된, '고난 후 부활'의 예언을 믿지 못하는 두 사람의 어리석음을 아쉬워했다.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야 두 사람은 그 사내가 부활한 예수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성경에는 예수가 율법서와 예언서, 성서에서 자신에 관한 기사를 설명해 주었다고 했을 뿐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다. 아마 길에서 만나 저녁을 먹을 때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았을까?
마침내 예수의 말에 뜨거운 감동을 받아 절망에서 벗어난 그들은 곧바로 가던 길을 되돌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목격한 예수 부활의 진실을 알린다.
이 이야기가 실제인지 아니면 은유적 묘사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떤 경우든 나는 부활한 예수보다 열린 마음으로 진실을 받아들이고 삶의 전환을 이룬 두 사람의 결단에 주목한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그 본원적인 현상에 있어서는 삶의 위기와 관련된 것이다. 아무 문제도 없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인간의 사유는 잠자고 지성은 시들고 아무 반성도 비판도 있을 수 없다. 참다운 삶, 참다운 깨달음은 언제나 인간을 그의 무거운 타성과 대결하게 만들고 다시 고쳐 배우게 하고 종래의 안일한 생각들이나 의견들을 지양하게 한다. 인간은 위기의 강압을 통해서만 참다운 앎과 참다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깨달음은 언제나 넓은 의미에서의 자기비판을 통한 자아인식이다.
- 이규호, 『앎과 삶』중에서 -
자신의 생각과 신념에 대한 치열한 객관화와 내적 성찰은 언제나 고귀하다.
성경에 무지한 나는 거기에서 부활의 뜻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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