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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웁시다

by 장돌뱅이. 2024. 5. 18.

시인 황지우는 1980년 5월 서울대에 재학 중이었다.
1972년 입학했는데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동하여 강제 입영되었다가 복학하여 논문 준비 중이었다.
그 무렵 그는 광주에 있던 큰형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광주가 쑥대밭이 되었고 지금도 금남로에 상공에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으니 황지우는 물론 동생도 절대 광주에 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동생도 시국 문제로 지명수배 중이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큰형 자신은 통역을 자원하여 외신기자들에게 계엄군의 만행을 알렸다.
그가 번역해 준 내용은 <뉴스위크>를 통해 세계에 전해졌다고 한다.

아일랜드 화가 로버트 발라는 고야(Goya)의 유명한 그림 &lt;1908년 5월 3일&gt;을 단순화시켜 새롭게 그렸다.

5월 30일 황지우는 '땅아 통곡하라'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만들어 가방에 담고 집을 나섰다. 정장을 하고 꽃다발을 들어 위장을 하였다. 종로 단성사 앞에서 그 유인물을 뿌리고 이동하다가 청량리 지하철 역에서 체포되어 계엄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갔다. 그는 '반복되는 고문 속에서 자신에게 육체가 있다는 사실을 저주하였고'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의 유인물 몇 장 살포는 김대중 내란 음모와 관련된 도심지 폭동 사건으로 조작되었다.

1980년 5월 30일 오후 2시, 나는 청량리 지하철 플랫폼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을 보았다. 그 문에 이르는 가파른 계단에서 사람들은 나를 힐끗힐끗 쳐다만 보았다. 가련한 지고, 서울이여. 너희가 바라보는 동안 너희는 돌이 되고 있다. 화강암으로 빚은 위성도시(衛星都市)여, 바람으로 되리라. 너희가 보고만 있는 동안,
 주주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웁시다, 최후의 일인까지!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내 소리를 못 듣느냐?
 아, 갔구나, 갔어. 석고로 된 너희 심장을 내 꺼내리라.
 나에게 대들어라. 이 쇠사슬로 골통을 패주리라.
 왜 내가 너희의 임종을 지켜야 하는지! 잘 가라, 잘 가라.
 문이 닫히고 나는 칼리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 갔다.
 파란 유황불의 화환(花環) 속에서 나는 눈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몸이 없어지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부끄러움의
  재 한 줌.

- 황지우, 「나는 너다 44」-

'민주주의'에서 '민'이 빠지고, '싸웁시다'에서 '싸'가 빠일 수밖에 없는 외침.
요즈음 자주 벌어지는 '입틀막'의 광경이 그려진다. 

5.18민주화운동 44주기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터무니없는 억지 음모와 색깔을 뒤집어 씌우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
또 어떤 이는 '맨날 그 얘기냐?', '이젠 지겹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세월호와  이태원참사를 두고도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세상엔 우리가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그 대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형편 없어지고 초라해지는 사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사실들에 늘 다시 그리고 새롭게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주주의'가 되고 '싸웁시다'는 '웁시다'가 된다.
아니 제대로 울지도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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