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꾼에 가기 전부터 인근에 있는 옛 마야 MAYA의 사적지, 치첸이쌰 CHICHEN ITZA 의
존재와 명성에 대해서 들은 바 있다. 여행 안내서에서 거대한 피라미드의 사진을 볼 때는
'언젠가는 가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눈 여겨 보아두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 깐꾼 여행을 준비하면서 치첸이쌰를 두고 아내와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간다면 투어로 할 것인가 차를 빌려 직접 몰고 갈 것인가,
아니면 개별 가이드와 함께 갈 것인가 등등.
데이투어는 소요시간이 대체적으로 총 12시간이라고(아침7시에서 저녁7시까지) 했다.
인터넷에는 투어에 만족하는 글도 많았지만 불만도 만만찮았다.
불만은 주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너무 서두른다는 점과
기념품점에서의 무의미한 오랜 정차,
그리고 치첸이쌰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장사꾼들의 거친 호객 행위 등이었다.
CHICHEN IZTA WAS THE ONLY RUIN SITE THAT HAD THE VENDERS WITHIN THE
RUINS. IT WAS REALLY QUITE HORRIBLE TO BE HARRASED BY THESE PEOPLE.
THEY WOULD FOLLOW YOU, STAND IN YOUR WAY, GET IN FRONT OF YOU WHILE
TAKING PICTURES, HARRASS MY LITTLE GIRL OF 7YEARS, "LADY LADY ONLY ONE
DOLLAR", WHISTLING AT US
렌트카를 이용하는 방법은 깐꾼에서 2시간 반정도 걸리는 치첸이쌰까지
시간 손실 없이 가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장 많이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여행의 촛점을 휴식에 두려고 하자 심리적으로도 거기에 적응된 탓인 지
이상하게 이번 여행은 전에 없이 운전하기가 싫었다.
개별 가이드와 함께 가면 운전도 피하고 시간도 효율적일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되었으나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로는 막상 도착해서 알아보니
가이드를 접촉하기가 쉽지 않았다.
망설이던 치첸이쌰행은 어제 저녁 무헤레스섬에서 돌아오면서
호텔 내 여행사에서 예약을 하는 것으로 확정을 지었다.
결국 가장 통상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투어의 내용이나 호객꾼들이 주는 혼란스러움은,
이미 동남아 여행에서 더러 경험한 바 있지만,
치첸이쌰의 덕으로 살아가는 멕시칸이나 마야인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하나의 풍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버스는 예정대로 이른 아침에 출발을 했다.
2층의 대형 버스는 공간이 넓고 쾌적했다.
의자는 2인용 좌석과 가운데 작은 좌석을 두고 4명이 마주보는 좌석이 있었는데,
우리는 2명이었음에도 버스에 늦게 올라 4인용 자리에 앉게 되었다.
다음번 들른 호텔에서 앞좌석의 주인들이 올라탔다.
미국의 미네소타에서 (매우 추운 곳임을 과장된 몸짓으로 설명하면서)
추위를 피해 왔다는 미국인 청년들이었다.
치첸이싸까지 가는 2시간 반 동안 여행사의 가이드는 쉬지 않고
마야인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했다. 처음에는 잠시 주의를 집중해보았으나
나중에는 무의미하게 느껴져 귀 담아 듣지 않고 책을 읽었다.
가이드 자신도 그렇고 우리를 위해서도 좀 쉬게 나뒀으면
서로 편할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아쉬움은 치첸이쌰에 들어가서도 계속되었다.
다른 버스로 온 가이드들도 여행객들 앞에서 거의 동일한 내용을,
동일한 몸짓으로 쉬지 않고 설명을 했다.
한마디로 설명과잉이었다.
이곳 일일투어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관행 같았다.
어디쯤에선가 버스가 멈추더니 모두 창밖을 보라고 했다.
차창 밖에는 선인장 밭이 펼쳐져 있었다. 멕시코의 술, 떼낄라 TEQUILA를 만드는
'푸른 아가베' AGAVE AZUL 선인장이라고 했다.
문득 또 다른 선인장 때문에 20세기 초 제물포를 떠나 이곳 유까딴 YUCATAN
반도까지 노동 이민을 떠나왔던 우리의 선조들이 생각났다. 지금은 합성섬유에
밀려났지만 한때 선박용 로프 원료로, 유까깐의 주요 산업이었던 에네껜 HENEQUEN
이라는 선인장을 채취하는데 한국인들까지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먼저 이곳에 온 일본 노동자들과는 달리 당시의 한국인들은 계약대로의 조건을
보장 받지 못했고, 낯선 더위와 환경, 그리고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고 전해진다. 스스로 선인장 이름을 빌려 '애니깽' 불렀다는 그 후손들이
지금도 멕시코는 물론 중남미의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산다고 한다.
인간의 자취와 사연이 스민 자연은 본래와는 다른 정서와 감성을 드러내는 법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백여 년 전까지 우리 같은 얼굴에 같은 언어를 쓰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보니
그때까지 무심히 흘러가던 창밖의 햇살과 수풀 우거진 풍경에도 자꾸 눈이 가게 되었다.
버스는 듣던 대로 치첸이샤로 가기 전 마야인들이 운영하는 기념품점에 들렸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시간도 겸해서 주어졌다.
깐군의 해변에서 뜨내기 장사들이 파는 은세공품은 모조품일 가능성이 많으나
이곳 제품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사람들이 내리고나서 얼마의 시간 동안은 버스문을 잠궈 두는 것은
사람들을 기념품점에 머무르게 하려는 좀 속 보이는 상술인 것 같았다.
그러나 물건을 사지 않는다 하여도 괴로울 정도로 오랜 기다림은 아니었다.
치첸이싸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유명 유적지답게 관광버스와 사람들로 북적였다.
치첸은 마야어로 '샘의 입구'을 뜻하며 이싸는 이 지방을 지배했던 부족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치첸이싸는 '이싸족의 샘의 입구' 쯤 된다고 하며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였다고 한다.
치첸이쌰는 원래 마야인들이 거주해온지역이었으나 10세기 경 멕시코 중앙고원 부족인
똘떽 TOLTEC 의 침입을 받아 현재 보이는 치첸이쌰의 건축물에는 두 문화가 혼합되어
나타나 있다고 한다.
마야 문화의 주신은 꾸꿀깐 KUKULKAN (똘떽 문화의 께짤꼬아뜰 QUETZALCOATL)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서야 깐꾼 해변의 뒷쪽을 관통하는 큰 길이 "꾸꿀깐" 이라는
좀 이상한 이름이었던 것이 이해가 갔다.
꾸꿀깐은 날개가 돋힌 뱀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마야인들이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고 믿었던 성스러운 이미지의 문화적 상징물이다.
치첸이쌰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건물은 당연히 꾸꿀깐을 모시는 까스띠요
EL CASTILLO 신전이다. 사각의 피라미드의 까스띠요 신전은
가파른 경사의 사면과 각 사면의 중앙을 관통하는 계단 꼭대기에
다시 사각 모양의 신전을 두고 있다.
이 건물의 각 면과 계단은 마야인의 달력, 곧 일과 월 그리고 일년을
상징하는 수치들로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춘분과 추분의 오후 태양이 비치면 북쪽 난간 양쪽에 있는’
'날개 돋힌 뱀 조각'이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서서히 몸을 꿈틀거리며
내려오는 뱀의 형상을 띤다고 한다.
독특한 자신들의 문자체계를 지닌 마야인들이 천문학과 산술학에 있어서도
상당한 경지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 하겠다.
예전에는 계단을 올라 신전의 꼭대기까지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신전에 오르는 것이 금지 되어 있다.
아쉽기는 했지만 계단 앞에서 올려다본
마야인의 신전은 여전한 위풍당당으로 감동을 주었다.
치첸이쌰에 들어온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가이드는 안내는 그칠 줄을 몰랐다.
아내와 나는 좀더 자유롭게 유적지를 거닐 고 싶었다.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것이 강제사항은 아니었으나
열성적인 설명을 무시하고 자리를 뜨기가 눈치가 보였다.
버스 안에서 느꼈던 '설명과잉', 치첸이쌰의 데이투어에서는
그것을 굉장한 서비스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결국 꿀꿀깐 신전을 지나 옛날 마야인들의 구기 경기장이었다는 곳에서
아내와 나는 슬그머니 무리들에서 빠져나왔다.
'아는만큼 보인다' 명제가 문화유적 답사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지식에 앞서 정서적으로 낯선 외국 유적지인지라
세세하고 단편적인 지식에 연연하는 것보다는
천천히 거닐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치첸이싸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아내와 나는 무리에서 이탈한 '알바트로스'가 되어 치첸이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나중에 책을 보니 구기 경기장 이외에 해골조각제단, '전사의 신전' 등을 돌아다닌 것 같았다.
아내와 내가 옛 사람들이 살다간 흔적을 자주 찾는 것은
어떤 기묘하고 특이한 것들에 관심이 있거나
고고학적 지식 따위를 늘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해묵은 것들이 주는 넉넉한 분위기를 좋아해서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멀거나 가깝거나
우리가 서있는 오늘은 옛 사람들이 이룬 것들 위에 있는 것이고
그속을 천천히 걷다가보면
얼굴에 부딪는 바람 한 줄기조차도
마치 우리가 떠나온 먼 고향에서 오는 것인양
편안하고 아득한 그리움을 불러모은다.
건축물도 그렇지만 곳곳에 새겨져 있는 다양한 조각 문양들도 눈여겨 볼만 했다.
그것들은 마야인의 꿈인양 아기자기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치첸이쌰에서 호객꾼들의 극성은 인터넷에서 말하던 것처럼 심하지 않았다.
아마 멕시코 당국의 어떤 조치가 있거나 자체적인 정화 노력의 결과인 듯 싶었다.
커다란 조각품을 들고 여전히 '원달러, 원달러'를 외치는 사람들은 많았다.
거래가 성사 될 듯 싶으면 '원달러를 깎아 준다'는 뜻이었다거나
'마야인의 원달러는 미화로는 50달러'라고 생떼를 쓴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가이드도 주의를 준 터라 흥미를 보이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아래 사진의 노점상에서 비의 신 차끄 CHAC 가 새겨진 작은 마그넷 하나를 샀다.
마야인들은 농사에 중요한 비를 관장하는 차끄(CHAC)에게 여러가지 제물을 바쳤다.
쎄노떼 CENOTE라고 부르는 '성스러운 샘'은 제물을 바치는 곳이었다.
치첸이샤의 북쪽에 그 샘 중의 하나가 있다. 오래 전 발굴을 위해 쎄노떼의 물을 뺐을 때
그곳에는 금과 옥 같은 귀중품에서부터 동물과 사람들의 뼈까지 나왔다고 한다.
마르지 않는 샘은 마야인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위 사진 : 치첸이쌰 안에 있던 '성스러운 샘'
치첸이쌰를 나온 이후의 일정은 간단했다.
식사를 하고 인근 최대의 쎄노떼라는 곳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깐꾼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쎄노떼는 당밑을 흐르는 강이 드러난 것 같은 커다란 물웅덩이였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수영을 하거나 높은 계단을 올라 다이빙을 했다.
아내와 나도 수영복을 가지고는 갔지만 주어진 시간이 30분 정도여서
그냥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을 했다.
이곳에 들르는 대신 차라리 치첸이싸에서 시간을 더 주었으면 하는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었을 뿐 몇몇 사람들은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풍덩풍덩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버스는 아침에 갔던 길을 되짚어 날이 어두워서야 깐군의 호텔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사전에 알았던 것처럼 빡빡한 일정의 투어라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호텔베란다에서 다시하루를 마감하는 우리의 '제물' 맥주를 마셨다.
매리엇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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