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빛 속에 드러난 창밖 세상은 온통 쪽빛이었다.
바다와 하늘이 같았다. 특히 바다에는 밤새 누군가 엄청난 양의 푸른 물감을
흘려 놓은 듯 짙거나 옅은 푸른 색이 오묘하게 조화로운 띠를 이루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물풍경은 물 자체가 아니라 물을 담고 있는 가장자리에서
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는 어느 책에서 읽은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깐꾼에서 바다는 그 자체만으로 가장자리를 압도하고 있었다.
샌디에고와 깐꾼은 2시간의 시차로 동쪽의 깐꾼이 빠르다.
거기에 어제 저녁의 늦은 도착과 늦은 잠으로 아내는 아직 기상 전이다.
나는 가만히 문을 열고 혼자 해변으로 나왔다.
바다를 향해 몇 장의 사진을 찍었고 호텔 난간에 서서
사진으로 담기에는 넘치는 잉여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아 두려고 애를 써보았다.
그리고 카메라를 프론트에 맡겼다.
해변을 따라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해변달리기는 언젠가부터 바닷가로 여행을 가면
내가 바다에 바치는 어떤 의식같은 절차다.
나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깐꾼의 해변은 호텔의 담들이 바다 쪽으로 바투 다가서 있어 옹색할 정도로 폭이
좁았다. 거기에 드러난 원래의 바위와 호텔의 건축물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
콘트리트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조심해서 발을 내디어야 했으므로 바다를 보며
달리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모래밭을 보며 달려야 했다.
결국 오래지 않아 걸음을 바꾸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한 시간 정도의 산책을 마치고 아내와 아침식사를 하러 나섰다.
로비에서는 로컬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얼마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 관련물을
제작하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사회자의 익살스런 멘트에 이어진
캐럴송이 로비의 분위기를 한충 밝게 했다.
오늘의 일정은 수영장과 바다에서 낙지처럼 늘어져서 지내기.
서둘 일이 없으므로 느긋하게 식사를 마쳤다.
해는 높아져 햇살은 이제 열대 본격적인 더위를 쏘아댈 기세였다.
수영장 가에 누워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다시 몸을 일으켜 아침에 보았던 푸른빛의 눈부신 바다를 보았다.
햇살이 따가워 물 속에서 물장구질을 쳤다.
아내와 개구쟁이처럼 물싸움을 했다.
책을 읽었다.
바람이 살갗을 간질이며 불어갔다.
살포시 졸음이 왔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가 책을 놓치는 감촉에 깨어나기도 했다.
목표와 성취와 실적과 분석과 논리가 없는
황홀한 권태와 감미로운 무위의 시간이 구름처럼 흘러갔다.
늦은 오후 바닷가로 자리를 옮겼다.
몇번인가 파도타기를 하며 놀다가
이제는 낙지보다 더한 해파리가 되어 의자에 늘어졌다.
은목거리나 팔찌, 혹은 다른 기념품을 파는 아저씨들이 가끔씩
눈을 맞추며 다가와 구매의사를 타진했을 뿐 해변은 조용했다.
구운 랍스터 껍데기 색깔로 몸을 익힌 사내들과
비키니 차림의 아가씨와 아줌마들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바다를 배경으로 오고갔다.
사내들보다 그런 비키니에 카메라 촛점을 맞추는
나의 응큼함에 아내는 "장돌뱅이가 저러는지 누가 알까..." 할 뿐
어디선가처럼 눈을 흘기지는 않았다.
저녁은 호텔 밖에서 하기로 했다.
우선 버스를 타고 숙소에서 서너 정거장 떨어져 있는
이슬라 쇼핑몰 LA ISLA SHOPPING MALL로 갔다.
유명 상표들의 매장이 모여 있는 깔끔한 곳.
미국에서 살면서 대형아울렛을 자주 보아서 그런지 그다지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산책 삼아 이골목저골목을 걸어다녔다.
이슬라쇼핑몰의 서쪽은 바닷물로 이루어진 바다처럼 거대한 호수였다.
그 너머로 어느 덧 해가 지고 있었다. 일몰을 보고
노점식당에서 간단한 크레페 한쪽으로 저녁을 했다.
그리고 깐꾼을 기념할만한 기념품을 찾아 상점 몇 군데를 돌아보았다.
밤이 되었다.
우리는 베란다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빛이 사라진 바다에는 어제처럼 다시 파도소리가 요란했다.
스피커의 볼륨을 높여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셨다.
아내와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오래 머무르고 싶은 시간이 있다.
지금 같은 지금이 그렇다.
지금은 지금이어서, 어제나 내일이 아니어서 소중하다.
추상적이 아니라 즉물적인 것,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느낄 수 있는 것
- 여행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따라 우리를 그 지금 속에 머무르게 한다.
우리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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