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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찬밥이건 더운밥이건

by 장돌뱅이. 2024. 5. 30.

손자저하 1호의 하굣길에 마중 나갔다.
저하는 현관문을 걸어 나오면서 손 한 번 슬쩍 들어 올리는 것으로 나를 알아봤다는 표시를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달려 나오며 반가움을 표시했는데 이제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더 열심이다.
가까이 다가와서는 다분히 나도 들으라는 의도로 친구에게 말했다.
"야, 너두 뭐 먹으러 같이 가자. 우리 할아버지가 사줄 거야." 

학교 앞 무인점포점에서 저하와 친구는 아이스크림과 축구 카드를 고르고 나는 뒤처리(계산)를 했다.
간식을 먹은 저하 일행은 놀이터로 갔다. 그리고 금지된 곳과 위험한 곳만을 골라 오르내렸다.
며칠 전에 누군가가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고 한 어른이 주의를 주고 지나갔다.
"다리 다치면 축구를 못할 수도 있어."
나의 저하가 좋아하는 축구를 예로 들어 공포심을 조장해 보았다.
저하는 주춤하는 것도 잠시 이내 더 격렬한 놀이 모드로 돌아갔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저하가 놀 때 나의 동참은 'must'였다.
내 역할은 주로 놀이의 재미를 돋우는 악역과 술래였다.
물론 나도 그 역할이 재미있고 보람도 있었다.
당시에 나는 저하에게 최고의 관심과 인기를 받는, 가히 'BTS'나 '임영웅' 같은 스타였다. 

그런데 이제 놀이에 초청을 받지 못한 채 가방을 대신 들고 목마르지 않게 물을 준비해서 나무 그늘에 앉아 있어야 할 뿐이다. 팬들의 관심과 환호성이 떠난 퇴물 연예인 같은 찬물 신세가 된 것이다.
저하의 재잘거림과 활기찬 움직임을  지켜보는 일은 여전한 즐거움이지만.

1호저하의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주고 태권도 학원 버스에 태워보내자 2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왔다. 1호에게는 버림받았지만(?) 2호에게는 여전히 나는 최고의 스타이며 더운밥이다.
나하고 놀면 제 엄마 아빠의 출근이나 퇴근도 별 관심 없다.
2호저하는 주로 몸을 크게 써서 놀아 주어야 해서 힘들다.
하지만 'THE MORE 고단, THE MORE 행복'이다.
1호의 경우로 보건 데 2호저하에게 더운밥일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Max. 4년이 될 것이다.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
숨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것은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
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놓은 꽃가루 속에
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  이용악, 「꽃가루 속에」 -

잊혀진 찬밥이건 여전한 더운밥이건 이 시를 읽으며 저하들을 생각했다.  
저하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허접한 나의 칼림바 연주를 입혀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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