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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장일순 평전』

by 장돌뱅이. 2024. 8. 14.

아내와 나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주신 수녀님께서 '무더위를 식혀줄' 책이라며 『장일순 평전』을 보내주셨다. 읽는 동안 정말 더위를 잠시 잊을 만큼 마음이 편안해지는 책이었다.

무위당(无爲堂) 장일순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원주에서 살았고 원주에 묻혔다.
그는 가난한 화가에게 자기 담뱃갑을 건네주고 자신은 길에서 꽁초를 주워서 피는 사람이었고, 소매치기를 당한 사람에게 돈을 찾아 돌려주면서 또 동시에 소매치기에게 손해를 끼쳐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이었다. 잠든 아내에게 부채질을 해주어 더위를 쫓아주는 사람이었고, 좌절하거나 힘들어하는 주변의 노래꾼, 예술가, 활동가, 장애자, 자영업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용기를 주었다. 그는 항상 낮은 자세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구체적으로 응답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자신을 감시하는 경찰에게까지 따뜻한 덕담을 건넸다.

이영희 교수의 말을 빌면 그는 또한 '숨소리를 내기조차 두려웠던 군부 독재 시절 치열하게 싸우다 비틀거리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싸움의 방법을 모색하는 이에게는 지혜를 주었다. 그의 집은  동지들이 찾아가는 오아시스였다. 회의를 고백하는 이에게는 신앙과 신념을 주었고, 방향을 잃은 이에게는 사상과 철학을 주었다. 그는 상처받은 가슴을 쓰다듬는 위로의 손을 주면서도 언제나 공과 영예는 후배들에게 돌리며  평생을 '한 알의 작은 좁쌀(一粟子)'로 자처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의 집은 늘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장일순 평전』에는 그런 그의 일화들이 무수히 실려 있다. 

80년 대 그러니까 시인 김지하가 오랜 감옥 생활에서 풀려나 출간한 장시 『대설(大說)』과 『밥』을 출간했을 때 그의 사상의 넓이와 깊이에 압도당하며 읽었던 적이 있다. 특히 『밥』은 구구절절이 신선하게 와닿는 말들로 가득해서 김지하의 선각자적인 깨달음에 긍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80년대라는 시대 상황에 비추어 너무 한가로운 이야기는 아닐까 고개를 갸웃하며 읽어야 했다. 마치 집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죽고 있는데 원론적인 소방법규를 뒤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작은 이야기'(小說)가 아니라 '큰 이야기'(大說)을 하겠다는 장시『남(南)』은  온갖 경계를 넘나드는 듯한 거침없는 활발함과 김지하 특유의 현란한  필법은 있지만 시적 소양이 없는 나로서는 이전의 그의 담시가 보여주었던 촌철살인과 시대정신을 읽어내기 힘들었고,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의 '깊어지고 넓어진'  생명사상도 추상적이고 사변적이며 모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80년대라는 시대적 긴박함이 더욱 그런 느낌을  들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서정시집 『애린』에서 느껴지는 어떤 산뜻하고 살가운 기운만이 그래도 김지하를 떠올리게 했다. 

 급기야 1991년 젊은이들이 분신으로 외치는 상황에 던진 '죽음의 굿판 집어치우라'는 난데없는 호통은 그의 '변절'과 '투항'을 확신하게 했다. 내겐 실망이라기보다는 아픔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마음속에 간직해 왔던  저항의 상징이었고, 전설이었고, 신화였던  김지하를 내려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그가 보여준, 세세하게 적을 필요도 가치도 없는,  많은 언행도 그러했다.

(* 이전 글 : 2022.05.13 - "그것이 지금이라면" 중에서)

『장일순 평전』을 읽으며 김지하의 사상이 시인 스스로의 치열한 독서와 사색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장일순과 사상적 교류를 통해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장일순은 '이질적으로 보이는 사상들을 아무 모순 없이 커다란 용광로처럼 융화시켜 나가는 사람이었다. 천주교 신자였지만 생활양식은 노자적이면서도 불교적이고, 불교적이면서도 기독교적이었다. 그는 단지  가톨릭의 규율은 물론 어떤 이념이나 종파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장일순은 '동학(東學)에서 생명운동에 대한 비전을, 그리고 생명의 철리를 노자에게서 발견하였다.'

그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곧 "조그만 티끌에도 우주 전체가 들어 있다"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목숨을 가지고 태어난 것들은 그 어느 것도 하찮은 미물이라고 외면하지 않으며 깊은 주의를 기울여 공경의 자세'로 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극히 세세한 일상 속에서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 안에 '한울님'이라고 불러도 좋고 '부처'라고 불러도 좋고 도(道)라도 불러도 좋고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가도 없고 한도 없는 근원적 생명을 산 채로 모시고 있다는 생각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 김지하, 『밥』 중에서 -

김지하의 말년이 어쨌든 80년대와는 다른 시대인 지금  '생명사상'은 시대적 담론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김지하는 '인간해방의 열쇠가 '생명'이며 생명의 가장 철저하고 창조적이며 전위적인 담지자가 바로 민중이며, 천대받는 민중이 가장 고상한 한울님이요 참생명'이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김지하의 것이자 장일순의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장일순의 서화는 늘 상대가 있었고,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였다. (사진과 글 출처 : 『장일순 평전』 )

장일순은 이천식천(以天食天), 사람이 밥을 먹는 것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 것이라는 동학 교주 해월 최시형의 사상을 이어받아 밥을 먹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 장일순 사상의 구체적 표현이 "한살림"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빵만 아니라 생명인 빵의 의미와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 시천(侍天)의 각성이다.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이를 준비하고 있는 각성되고 해방된 인간의 정신은 '자기 안에 있는 우주 안에 자기가 있음'을 깨닫고 있다. 진화의 분기점에서 방황하고 있는 이 시대는 '우주 속의 인간', '인간 안의 우주'라는 자기 이미지를 지닌 새로운 이념이 나와야 할 때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생명의 이념과 활동인 '한살림'을 펼친다.

1986에 시작한 "한살림" 조합 운동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가게를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홈페이지에는 '밥상살림·농업살림·생명살림'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올바르게' 생산한 '올바른' 식재료를 '올바르게' 먹자는 것 같다. 그 원칙에 찬동하면서 아내도 조합원이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별로 그곳을 이용하지 않는다.
이른바 '유기농'이라는 농산물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런 식의 생산과 소비 방식이 우리 식생활의 기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비싸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안 쓰고 유기농이 개별적인 건강의 바탕이 되고 지구까지 살린다니 가격이 높은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식재료에도 빈부의 경계선이 느껴져서 거부감이 든다.
아내와 나는 손자들 음식을 만들 때를 빼곤 특별히 유기농에 집착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한반도는 농사짓기에 좋은 땅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한다.
70% 이상의 산지라 지평선이 거의 없고 지질학적으로 늙은 땅이라 유기물 함량이 적다. 여름 2개월 동안 2천 mm 내외의 집중호우가 내리고 고온다습하여 병충해가 들끓으며 겨울엔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이 많아 시설이 아니면 작물 재배가 어렵다.

우리나라가 벤치마킹 하(려)는 유기농의 나라 독일의 환경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독일은 비옥한 평지가 많고 연간 강수량이 500mm로 우리나라의 35%∼50%이지만 연중 고루 오고 겨울 최저 기온이 영하 7도 정도여서 냉해 피해가 거의 없는 천혜의 농업 여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에 비해 한반도는 먹을거리를 넉넉하게 생산할 수 있는 땅이 아니다.
5천 년 역사에 단 한번도 먹을거리를 자급한 적이 없다. 현재도 40% 정도이다. 한반도의 자연환경에서 유기농은 생산성을 확보할 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소수를 위한 차별적 먹을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예로
10여 년 경력의 유기농 과수원에서 겨우 20%의 정상 과일을 거둔다. 80%는 과즙으로 만들어 팔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유기농은 농약과 화학비료의 공포를 먹이로 성장하였다. 고독성 농약의 과도한 살포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저독성 농약의 적절한 사용까지 문제가 삼아서는 안 된다. 조금 '넓고 넉넉한' 마음으로 한국의 먹을거리를 생각할 때이다.
(*황교익의 글 「유기농이 한국인을 먹여 살리 수 있는가」를 참조·요약했음)

오래전 한 선배로부터 재야에 묻혀 사는 '고수'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경북 봉화의 전우익, 안동의 권정생 그리고 원주의 장일순이었다.
앞선 두 사람은 직접 볼 기회는 없어도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었지만 장일순은 풍문으로만 몇 번인가를 듣다가 이번에 평전으로 읽게 되었다. 장일순은 어떤 책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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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책을 보내주신 스승님(이자 천주교의 유일한 '빽')이신 수녀님, 감사합니다.

직장 일로 미국에서 7년여의 생활을 하는 동안 내게 가장 큰 변화는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종교를 가졌다는 사실에 아내와 딸아이가 놀랐지만 돌이켜보면 내 스스로가 더 놀라운 일이었다.

미국에 가기 전부터 절대자의 존재를 가끔씩 생각해 보긴 했지만 신이 나만을 특별히 사랑할 이유가 없어 보였고, 길거리나 TV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 상징되는 고답적인 선교 행태를 볼 때마다 고개를 저어 왔던 터였다. 군생활에서부터 몇 번을 읽은 성경은 종교적 영성에서가 아니라 그저 인류의 베스트셀러인  고전으로서였을 뿐이다. 


교리 수업을 받으러 가는 첫날 아내에게 말했다.
'여기서도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면 바로 돌아서 나오자'고.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댓 달쯤 받은 수업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나갔던 것 같다.
수녀님의 수업 진행 방식과 내용 덕분이었다. 수녀님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답답한 구속의 교리가 아니라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소파와 같은 새로운 세계에 대해 알려주셨다.
"바닷가에서 옷에 한두 방울 물이 튀길까 봐 주저할 때는 결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막상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온몸이 푹 젖었을 때는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아내와 나를 이끄셨던 것 같다.
 

나는 스스로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주 말한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볼 때마다 내게 무엇인가가 필요할 때 늘 그 무엇이 저절로 주어졌다.
아내가 왔고 딸아이가 왔고 손자들이 왔고 친구가 왔고 직장 상사가 왔고 수녀님을 통해서 절대자 존재를 (아직 냉담 수준으로나마) 조금은 인식하게 되었다. 
문제는 내가 아직도 그 '저절로' 온 것들의 소중함을 자주 잊고 툴툴거릴 때가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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