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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도담도담

by 장돌뱅이. 2024. 8. 13.

세상 모든 아이들은 개구지다.
평소엔 얌전한 아이들도 때와 장소에 따라선 엉뚱한 행동을 하고 가끔씩은 사고라 할만한 황당한 일을 저지른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규칙과  경계를 자신들만의 생각으로 쉽게 넘어서곤 한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랬다. 그냥 평균치의 아이여서 아무 일 없이 지나간 날이 더 많았을 터이지만 사건사고의 기억들만 모아 놓으면 마치 내내 사고만 저지르면서 자란 것 같다.
집에도 지천인 고구마를 두고 친구들과 이웃동네 남의 밭에서 서리를 하다가 잡혀서 혼찌검이 난 일, 대보름날 밤 그런 이웃동네 아이들과 투석전을 하다 머리가 터지거나 아침에 등교를 하다가 갑자기 시냇물에 헤엄을 치는 붕어가 잡고 싶어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다가 굴러 떨어져 다리를 심하게 다친 일, 초등학교 때 아침에 화장실 가면서 아버지가 들고 가는 담배가 어떤 맛일까 궁금해서 나도 한 개비를 훔쳐 피워보려다가 성냥불도 긋기 전에 걸려서 어른들의 우려스런 '문초'를 받은 일 등등.

이틀 연속 1호 손자저하가 다니는 학원으로  마중을 갔다.
원래 학원버스가 아파트 앞까지 태워다 주는데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첫날은 6층에 있는 학원 교실 앞까지 올라가서 만났다.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경고문이 곳곳에 붙어 있는데도 수업이 끝난 저하는 친구들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튿날은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 시간에  갑자기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저 엘리베이터 아니고 에스칼레이터로 내려가요." 
"에스칼레이터? 그게 어딨어?"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 주위에 물어서 달려가보니 저하는 위험천만하게도 작동 중인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신기하다는 듯 친구들과 낄낄거리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아이들을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서게 한 뒤에  유튜브까지 보여주며 에스컬레이터에서 일어나는(일어날 수 있는) 사고에 대해 저하와 친구에게 알려주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저하는 잠시도 차분히 걷지 않고 길가 계단을 뛰어 오르내리며 걸었다.
신이 났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계단을 뛰어내리는 것에 어쩔 수 없이 주의를 주어야 했다.
(지난 태국여행 때 계단에서 나동그라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계단이 몇 개 되지 않은 낮은 높이여서 다치지는 않았다. )

잠시 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려는 저하를 또 황급히 제지해야 했다.
내가 놀라는 걸 보려고 일부러 하는 저하의 의도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빠르게 뛰는 건 축구할 때만 해. 운동장에서야 좀 다쳐도 괜찮지만  계단을 뛰어내리거나 에스컬레이터에서 장난하는 것, 횡단보도를 급하게 뛰어 건너는 행동은 앞으로 절대 안 해야 해. 알았지?"
저하가 깊이 빠져있는 축구를 예로 들어 '안전교육'을 시켜보았지만 저하의 행동에 나의 잔소리가 무게감 있게 작용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른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한 이유겠다.

방학이라 학원과 축구 사이에 여유가 있어 저하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는 건 즐겁다. 저하가 이기기를 바라지만 게임 규칙상  그런 결과를 유도할 수 없는 게임도 있어 어떨 때는 저하가 이기고 어떨 때는 아내와 내가 이긴다.

가끔은 저하가 제법 의젓한 말을 해서 아내와 나를 웃게 만든다.
"이건 그냥 운이 있어야 이기는 게임인데 어렸을 땐 지면 왜 울었는지 모르겠어요."
'어렸을 땐'······. ^^  

 1호저하가 집에서 놀다가 다시 무슨 학원인가를 가면 이번엔 2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온다.
교대한 2호는 1호보다 더 몸으로 때우며 놀아야 한다. 한동안 자전거를 타고 공원으로 나가거나 소방서와 파출소를 순회하였는데 요즘은 저하의 관심도 시들해지고 워낙에 더운 날씨라 집에서만 논다. 

2호는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구조대 놀이와 택배 놀이를  무한 반복한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나는 무한 반복하는 같은 레퍼토리의 지루함을 견뎌야 한다. 
"아,  왜 택배아저씨가 안 오지? 전화를 해봐야겠네."
내가 전화기를 드는 순간 어느 틈에 자동차를 탄 택배아저씨가 곁에 와있다.
"벌써 왔습니다."
저하가 이렇게 말할 때 나는 깜짝 놀라야 한다.
"앗, 언제 왔어요? 고맙습니다."

이런 놀이를 20번쯤 반복하면 나는 뉴욕에서 열리는 스리 친모이 (SRI CHINMOY)를 떠올리게 된다.
스리친모이는 52일간 3,100마일(4,960KM)을 달리는 대회다.
마라톤처럼 긴 코스를 직선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883미터의 순환 코스를 5,649번 도는 방식이다.
엄청난 육체적 고통과 함께 단순함과 반복의 지루함을 견디는 명상 수행의 한 방식이라고 한다.
나의 '스리 친모이'는 엄청난(?) 즐거움이 더해진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가끔씩 저하는 나의 체력저하를 다르게 해석한다.
내가 소파에 앉아 쉬려는 기색이 보이면 다가와 진심어린 어조로 말을 건넨다.
"할아버지, 심심하지요? 내가 즐겁게 놀아줄게요. 이리 와봐요."
(1호도 2호의 나이 때 재미있는 타요버스나 삐삐뽀를 할아버지에게 보여주겠다고 선심을 쓰곤 했다.)

그래도 내가 버틸라치면 2호 저하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든다.
"내가 기운이 나게 해 줄게요."
저하의 최후의 무기는 '뽀뽀'다. 그것도 반드시 뺨에다 하는.
나는 저돌적인 저하의 대시를 피하는 척해보지만 결과는 온 얼굴에 저하의 침이 묻은 채 끝이 난다.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놀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 박성우, 「삼학년」-

도담도담은 '어린아이가 탈 없이 잘 놀며 자라는 모양'을 나타내는 순우리말 부사다.
아무쪼록
눈 깜빡할 사이에 일을 저지르고 숱한 이야기거리를 만들면서라도  두 저하가 도담도담 잘 자라기를, 우선은 이 더운 여름을 건강히 지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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