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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하루 또 하루

by 장돌뱅이. 2024. 8. 16.

늦은 밤 카톡.
"할아버지 내일 와요?"
손자저하 1호가 보낸 것이었다.
"아니? 왜? 무슨 일 있어?"
이번 주는 예정했던 두 번을 이미 다녀온 터였다. 
"아니요. 그냥요. 내일 아니면 모레는요? 모레는 와요?"
질문이 아니라 다녀가라는 저하의 바람이거나 명령이다.
"그냥? 그래, 그냥 좋지! 갈게."
"아침에 일찍 오세요."
나는 무조건 복종이다.
딸아이와 사위는 나와 저하가 전생에 부부였을 거라고 확신한다. 

저하의 카톡 덕분에 오래간만에 딸아이네와 온 식구가 함께 모여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마 지난봄 태국 여행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일주일에 몇 번은 저하들과 식사를 하지만 맞벌이 부부인 딸아이나 사위 중 한 사람은 대개 일 때문에 빠지기 마련이어서 동시에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쉽지 않다. 

딸아이는 번거로워하지 않고 직접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모처럼 휴일에 '피곤할 테니 매식을 하자'고 권하던 아내는 음식 맛을 보고 나선, 
"맛있네. 음식 솜씨는 장돌뱅이 집안 내력이라니까."
우리집의 '대장금'인 아내는 자신을 낮추고 유전자까지 거론하며 딸아이의 솜씨를 칭찬했다.

저하들의 재롱과 어리광, 시샘과 투정으로 식사 분위기는 더 자잘해지고 오붓해진다. 
"자, 세 숟가락만 더 먹자."
어린 2호 손자에게 한 숟가락 더 먹이기 실랑이도 살갑다.
아내와 결혼해서 딸 하나를 키웠을 뿐인데 이럴 때보면 사위와 두 명의 저하까지 새로운 식구들이 공짜로 더해져서 대단한 일가를 이룬 것 같다. 뿌듯해진 나는 아내에게  '뜬금포로' 당당해진다.

"봐, 연애할 때 내가 쫓아다니길 잘했지?"
"40년 뒤에 이런 즐거움이 있는데 왜 그땐 그리 빼면서 속을 썩였냔 말이지. 내 말은."

이날 저녁 손자저하가 지하철을 타고 우리집으로 와서 잤다. 카톡이 진화한 예정에 없던 결과다
저하는 갑자기 '할머할버' 집으로 간다는 게 신기하다는 듯 '꿈같다'는 말을 3번이나 반복했다.
'라떼'와는 다르게 방학이어도 매일 축구를 중심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는 저하다.
가끔 쉬어가는 것도 운동이고 공부라고 아내와 나는 생각했다.

모두의 마블, 데칼코, 간장공장공장장, GO FISH, 체커, 장기 등등.
저하와 아내와 나는 1박 2일을 보드게임을 하면서 보냈다.

아침은 머랭을 쳐서 수플레오믈렛을 만들었다.
일주일 전쯤 만들었을 때보다 잘 되었다.

저하도 부드러운 식감에 만족했는지 양손의 엄지를 세우는 최상의 평가를 해주었다.

아내가 아침에 어울리는 음악을 틀고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니까 태국 호텔에서 아침을 먹는 것 같다."
그 말에 집안을 한번 천천히 둘러본 저하가 당치 않다는 투로 말했다.
"호텔까지는 아니죠." 
"그럼?"
아내의 물음에 저하는 뜻밖의 말로 대꾸를 했다.
"모텔 정도?"
"모텔? 니가 모텔을 알아?"
"그럼요. 호텔보다 나쁜 곳이잖아요."
(저하는 지방에서 열리는 축구대회에 갔을 때 단체숙소로 모텔을 경험했다.)

저하는 나의 경제적 무능에 대해 거침없이 지적을 하곤 한다. 지난겨울에 와서는 '할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었을 것 같은데 왜 이런 아파트에서 살아요?' 하고 질책성 물음을 던져서 나를 버벅거리게 만든 적도 있다. 어릴 적에는 없던 비교를 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저하는 자기 집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점심은 집에서 가까운 "매드포갈릭"의 갈릭스노잉피자와 고르곤졸라피자로 했다.
저하가 우리집에 올 때마다 거르지 않는 최애 음식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 황인찬, 「무화과 숲」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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