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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믿을 수 없는 일

by 장돌뱅이. 2024. 8. 18.

*출처 : 최민의 시사만평

'그'가 '그'를 임명하였고 '그'는 취임 첫날부터 또 다른 '그'의 친일 행위에 대한 명예회복을 주장했다.
어떤 명예를 어디서, 어떻게 회복한다는 것일까?
친일인명사전에서 '그'에 대해 찾아 요약해 보았다.

1906년 생인 '그'는 일본과 미국, 헝가리에서 유학했다. 나중에 「한국환상곡」을 작곡하고 1938년 8월 부다페스트교향악단을 지휘해 베토벤과 리스트의 작품과 함께 지휘를 했다.
또한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越天樂)'」을 발표했다. 원래 '에텐라쿠'는 일본 천황 즉위식 때 축하작품으로 연주된 것으로 1878년 이후부터 근대 일본 창가로서 천황에 대한 충성을 주제로 한 일본정신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1941년부터 독일 베를린으로 진출해 나치 제국의 제국음악원 총재이자 협력자였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관현악단 지휘와 작품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국제적인 음악인으로 부각되었다. 

1942년에 만주국(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정부)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만주국 축전곡'을  의뢰받아 「만주축전곡」을 완성하였다. 내용은 '폭정으로 짓밟힌 옛 만주가 구원자인 일본에 의해 평화를 되찾고 건국 10년을 맞는 환희'를 그렸다. 1943년 7월에는 나치 정부의 제국음악원 회원증(회원번호 : RKK A 115)을 교부받음으로써 정식 회원이 되었다. 프랑스에 머물며 활동을 하다 독일이 패퇴하자 남쪽으로 피신하여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지에서 지휘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는 '애국가'를 국가로 공식 지정했다. 1955년 3월 '이승만대통령 탄신 제80회 기념음악회'를 지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고, 제1호 문화포장을 받았다. 1960년 3월에도 '이승만대통령 탄신 제85회 음악회'를 위해 다시 귀국했다. 1962년 1월 한국을 방문하면서 박정의 의장을 예방해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의 대내외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고 '혁명'을 경축하기 위한 대한민국 국제 음악제 개최를 협의했다. 1965년  9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같은 해 10월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1977년 7월 국립묘지 제2유공자 묘역에 묻혔다.

* 출처 :한겨레 그림판

1920년 생이기도 한 '그'는 만주국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에 창설되었으며 일제 패망 시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 차례 '토공(討攻)'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당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9월 초 평안남도 도인민위원회 치안대장을 지냈으며 1945년 12월에 월남하여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946년 2월 제1기로 졸업 뒤 중위로 임관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대령)으로 재직하면서, 좌익을 제거하기 위한 숙군(肅軍) 작업을 지휘했다. 1948년 11월, 박정희 소령이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혐의로 체포되자 구명에 앞장서 문관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1950년 7월 준장, 51년 4월 소장, 52년 1월 중장, 53년 1월 대장으로 진급했다.

1960년 5월 예편 이후 60년 7월 주중화민국 대사, 61년 7월 주프랑스 대사, 65년 7월 주캐나다 대사, 69년 10월부터 71년 1월까지 교통부장관, 73년 4월부터 80년 3월까지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그'는 2020년 99세로 사망했다.

그는 1897년 라인란트에서 태어났다.
 25세 때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에 가입, 4년 만에 나치스의 베를린 대관구 지도관이 되었고, 나치스 기관지 『안그라프』의 편집국장으로 6년간 활동하였으며,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국민 계몽 및 선전 담당 장관이 되었다.

 검열, 금지, 수색, 압수, 분서, 연행, 구속 , 투옥, 처형 등을 통하여 그는 문학, 예술, 언론, 방송, 영화 등 거의 모든 문화 공보 분야를 획일적으로 탄압, 통제하였다.
그는 또한 유태인 박해의 선봉이기도 했다.

 독재자에 대한 그의 충성과 파시즘에 대한 그의 신념이 얼마나 투철했던가 하는 것은, 히틀러가 유언에서 그를 수상으로 임명해 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945년 제3국이 패망하자 그는 베를린에서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도 그는 자기보다 훨씬 젊은 나이로 이 세상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지 않은가.

- 김광규, 「믿을 수 없는 일」-

사실 '그'는 대통령이고 독립기념관 관장이고 음악가다.
만주군(일본군)이다. 대한민국 군인이다. 대사다. 장관이다. 대기업 사장이다.
일란성 쌍둥이거나 샴쌍둥이인 '그'의 권력과 부는 우리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의 명예는 절대로 우리 것이 될 수 없다.

광복군 시절의 장준하(맨 오른쪽)

우리의 명예는 이런 사람에게 있다.
1918년에 태어난 장준하는 중학교 시절 일제에 저항하라고 가르친 교장이 일제에게 독립운동 혐의로 잡혀가자 격분하여 '일본어로 된 교과서로 배울 수 없다'며 '일본어 교과서 찢기 운동'을 주도했다.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전선으로 파병되자 동지들과 탈출하여  7개월간 일본군의 검문을 피해 가며 중국 대륙 수천 리를 걸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1945년 2월부터 한국광복군으로 미국 CIA의 전신인 OSS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3년 월간 시사잡지 『사상계』를 창간하였다.『사상계』는 지식인과 학생층의 인기를 누렸다.
4.19 혁명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으며 5.16 정변을 일으킨 박정희가 애초 약속했던 민정 이양을 파기하자 '그'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장준하는 정권의 탄압으로 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출마를 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에 굳힘 없이 대항하던 장준하는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으로 등산을 갔다가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정부는  실족사로 발표했으나 아직까지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완전히 해소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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