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직한 민주주의자(Loyal Democrat, 이하 LD')는 언제나 세 가지 기본적인 행동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첫째, 승패를 떠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이 말은 패배를 일관적이고 명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혹은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을 사용하는 전략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군사쿠데타를 지지하고, 폭동을 조직하고, 반란을 조장하고, 폭탄 투척 및 암살 등 다양한 테러를 계획하고, 정적을 물리치거나 유권자를 위협하기 위해 군대나 폭력배를 동원하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이 두 가지 기본 원칙을 어기는 모든 정당과 정치인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야 한다.
또 하나의 원칙은 반민주주의 세력과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Semi-Loyal, 이하 SL)는 위의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그 규칙을 공격한다. 얼핏 LD와 다르지 않게 보인다.
SL은 겉으로 규칙을 준수하고 심지어 그 규칙을 기반으로 성장한다. SL은 민주주의가 살해당했을 때에도, 그들의 지문을 남기지 않고 존재를 드러내지 않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LD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을 일관적이고 확고하게 거부하는 데 반해, SL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눈을 감는다. 주류 정당이 전제적인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묵인하고, 혹은 이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할 때, 민주주의는 곤경에 빠진다.
그들은 독재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조력자가 된다.
실제 역사에서 독재주의자와 SL의 연합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비법으로 작용했다.
LD와 SL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는 정치인들이 '자신과 관련된 세력'이 혹은 자신이 속한 당 내부에서 폭력적이거나 반민주적인 행동을 했을 때 보이는 행동이다.
LD는 이럴 때 네가지 원칙에 따른다.
첫째 당의 주류에 반대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내쫓으려고 한다.' 반면 SL은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손을 잡기까지 한다.
둘째, LD는 '반민주적 행동에 관여한 연합단체와 모든 관계를(정치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끊는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과 비밀 협약을 하거나 밀실 논의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SL은 극단주의자와 계속해서 협력을 이어감 정치적 연합을 형성한다.
셋째, LD는 이념적, 정치적으로 연합한 단체가 폭력적이거나 비민주적 행동에 관여했을 때(극단적인 양극화나 위기의 시기에 반민주적인 태도가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을 때에도) 확실하게 비판하고 법적 책임을 묻는다.
SL은 반민주적인 행동의 심각성을 축소하고 다른 진영의 유사한(혹은 더 심각한) 행동으로 여론의 화살을 돌림으로써 비난을 피하거나, 혹은 그러한 행동을 묵인하거나 정당화한다.
넷째, LD는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를 고립시키거나 물리치기 위해 자신의 원칙과 정치적 목표과 다른 경쟁자와 협력한다. SL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조차 경쟁자와 협력하지 않는다.
역사는 우리에게 주류 정치인들이 전략적으로 SL의 길을 선책함으로써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를 용인할 때, 극단주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고, 단단해 보이던 민주주의가 붕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이 주류 정당으로부터 암묵적인 지지를 받을 때, 그들은 법적으로 처벌받거나 공직에서 쫓겨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SL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더 급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들은 '헌법적 강경 태도(Constitutional Hardball)'를 통해서도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그들은 헌법 정신을 교묘하게 훼손시키며 법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한다.
헌법과 법률이 아무리 잘 설계되었다고 해도 애매모호한 부분과 잠재적인 허점이 존재하고,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으며, 여러가지 방식으로(그리고 다양한 강도로) 집행될 수 있다.
정치인은 바로 이러한 애매모호함을 이용해서 법을 제정한 목적 자체를 왜곡하고 뒤집을 수 있다.
그들은 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상대에 따라 과도하거나 부당하게 선택적으로 집행한다. 페루의 독재자 오스카르 베나비데스(1933∼1939)는 이런 말을 남겼다.
"친구에게는 모든 것을, 적에게는 법을."
마지막으로 정치인들은 공정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정적을 겨냥한 '새로운' 법을 만들기도 한다.
이를 일컬어 법률전쟁(lawfare)이라고 부른다.
21세기의 독재정권의 대부분이 헌법적 강경 태도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보이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민주주의를 점차 후퇴시킨다.
즉, 표면적으로 선거의 투명성을 높이고, 부패를 척결하고, 효율적인 효율적인 사법부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법안과 기존 법률을 재해석하는 법원 판결, 그리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지만 그들에게 유리하게 재발견해낸 법률을 동원한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은 2010년에 정권을 잡으면서 그런 식으로 사법부를 장악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언론을 장악했다. "구조조정" 명목으로 수십 명의 유명 기자와 편집자를 포함한 천 명이 넘는 공공 언론 근로자를 해고했다. 또한 '민영 언론'도 사들이거나 압박을 가하거나 폐간을 시켜 장악했다. 그리고 선거관리위원회마저 장악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총선 지역구를 집권당에게 유리하게 변경했다. 그래서 선거에서 득표율이 하락했어도 의회 의석수는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야당은 선거 광고마저 할 수 없었다.
긴 요약은 그것이 단지 이론이거나 남의 나라의 현실로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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