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날에 손자 저하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시간에 맞춰 나는 우리가 사는 층보다 한 층 높은 계단에 몸을 감추고 저하들을 기다렸다. 저하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어서 오시라' 하며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저하들을 놀라게 했다. 별 것 아닌데 두 저하들이 깔깔거렸다.
이번 추석에는 저하들의 예상을 깨기 위해 한 층 위가 아닌 아래 층 계단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2호는 차 안에서 잠이 들어 잠시 대기 중이라 했고 1호저하가 혼자서 올라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이리 오래 걸리지?' 생각하는 순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하는 나의 '서프라이즈'를 예상하고 다른 층에서 내려 등 뒤에서 제갈공명 같은 역습을 가한 것이다.
그렇게 저하들과 올 추석 '적벽대전'을 시작했다.
사진을 찍을 틈조차 없는 치열한 '전투'였다. 동양의 장기와 서양의 체스, 태국 툭툭(Tuktuk)을 포함한 여러 차량들, 주문과 배달, 긴급출동과 체포 등의 긴박한 상황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좁은 집에서는 저하들의 폭발적인 에너지 공세를 감당할 수 없어 운동장으로 나가 축구'전투'를 해야 했다. 1호는 발로 여러 번 공을 차는 리프팅 연습을 하고 2호는 나와 패스를 주고받았다.
2호는 매번 내가 서있지 않는 방향으로 공을 차곤 내가 놀라서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1호가 딱 그 나이 때 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2호는 올 추석에 큰 보너스를 받았다.
지나가는 경찰차에 손을 흔들자 경찰차가 스피커로 '안녕'이라고 대답을 해다.
"경찰차가 진짜 말을 하네."
2호는 놀라워했다. 말을 하는 경찰차 패트와 폴리는 텔레비전에서만 보았던 것이다.
경찰차를 따라가선 지구대 경찰관들의 환대에 경찰 스티커와 음료 선물까지 받았다.
그리고 정차 중인 경찰차에 타보는 감격까지 누렸다.
전투도 먹어야 한다. 야간 전투 개시 전 밥을 먹었다.
올 추석 음식은 아내가 90%를 했다. 나는 옆에서 보조를 했다.
송편은 동네 유명 떡집에서 사 왔다. 어릴적 추석 며칠 전 송편을 찔 때 사용하는 솔잎을 앞산에서 따오는 것은 나의 몫이었는데 이젠 추억이 되었다.
예전 어머님이, 그리고 얼마 전까지 아내도 가끔씩 추석이면 토란국을 끓였다.
그 토란국이 저하들의 입맛을 자극할 수 없을 것 같아 대신 생각한 것이 소고기뭇국이다.
아내가 색다르게 준비한 다진새우전은 2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추석 이틀 전 1호저하는 문자를 주고받을 때 올 추석 음식을 예상했다.
갈비찜과 삼계탕! 강렬한 '외압성' 예상이었다.
갈비찜은 자발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삼계탕은 명단에 없었던 터라 사흘 뒤 저하를 보러 갈 때 가져가기로 했다. 다음번 설날엔 아내로부터 갈비찜 만드는 법을 사사(師事)할 생각이다.
이번 추석에 내가 만든 유일한 음식은 지난번 태국 여행에서 사 온 블랙페퍼소스로 볶은 소고기다.
아내와 내가 얼마 전 시험을 했을 때 맛이 괜찮아 딸과 사위 용으로 상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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