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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손자저하 질문에

by 장돌뱅이. 2024. 9. 28.

손자저하 2호의 '퇴청'을 마중 나갔다.
오늘은 소풍날.
뭐 맛있는 거 먹었냐니까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웃는 소시지 김밥을 먹었어요."
무슨 소리인가 하고 알아봤더니 제 엄마가 위 사진과 같은 음식을 싸주었다고 했다.
딸아이는 '영양 따윈 고려 안 하고' 오직 저하 취향 저격용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제대로 조준한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자전거를 타고 소방서에 갔다.
저하는 경찰서나 소방서에 가면 질문이 많아진다. 이미 아는 내용도 묻는다.
"왜 오늘은 출동을 안 했어?"
"출동했다가 왔을 수도 있고 아예 출동을 안 했을 수도 있지."
"어디로 출동했어?"
"할아버지도 모르지. 도와달라고 전화가 오면 출동을 하니까."
"왜 전화를 해?"
"불이 날 때도 전화를 하고 몸이 아파서 전화를 할 수도 있지."
"불은 왜 나?"
"부엌에서 나기도 하고 전등(전깃불) 때문에 날 수도 있고 책에 나온 것처럼 개구쟁이들이 불장난하다가 나기도 해."
"오늘은 언제 출동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119로 전화를 하면 출동해."
"언제 전화가 와?"
"모르지. 불이 안 나거나 아픈 사람이 없으면 전화를 할 필요가 없잖아. 출동 안 하는 게 좋은 거야."

저하는 불자동차나 구급차가 경광등을 켜고 소리를 내며 출동하는 걸 보고 싶은 것이다.

구급차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출동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다.
소방관들이 그런 저하를 보고 오늘은 출동 안 할 거라고 얘길 해도 요지부동이다.
저하는 수줍어하며 나에게만 소방차가 출동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소방차 출동을 '직관'하겠다는 저하의 굳건한 의지는 매번 길 건너 맞은편 가게 쵸코아이스크림의 유혹을 넘지 못한다.

저하의 무수한 질문과 함께 걷는 시간은 한가롭다.
가장 좋은 표정으로 가장 좋고 가장 예쁜 말을  골라 답을 해주고 싶을 뿐이다.

세상에 와서

내가 하는 말 가운데서
가장 고운 말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가진 생각 가운데서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표정 가운데
가장 좋은 표정을
너에게 보이고 싶다

이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
나 스스로 네 앞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

-  나태주, 「너를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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