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근교에서 농사를 짓는 누나의 밭에 멧돼지가 자주 출몰했다.
놈은 애써 지은 농작물을 망쳐 놓기가 일쑤였다. 제법 규모 있는 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누나에게 농사가 생업은 아니어서 그냥 넘어갔으나 나타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점차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실제로 마주쳤을 땐 거리가 있었다 해도 공포가 최고조에 달했다.
하는 수 없이 행정관청에 신고를 하자 전문 사냥꾼이 와서 간단히 녀석을 사살해 버리고 갔다.
누나는 녀석의 덩치가 생각보다 커서 놀라면서도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멧돼지가 달려오면 길은 모두 직선이 된다
피할 수 없는 최단 거리가 된다
부딪히는 건 다 부러지거나 나동그라지는 속도가 된다
공포는 멀찍이 물러났다가 한참 뒤에야 덮쳐 온다
순간적으로 다리가 얼어붙지 않도록
미리미리 허벅지와 종아리에게 단단히 일러두어야 한다
무엇이든 들이받으면 뿔이 된다는 주둥이
감자밭 고구마밭에 가면 쟁기가 된다는 주둥이
멀리서도 트럭 엔진 소리가 난다는 육중한 주둥이가 온다
머리가 어디 있고 다리가 어디 달렸는지 알 수 없는
시커먼 바윗덩어리가 온다
씩씩거리며 내뿜는 뜨거운 어둠이 목덜미에 느껴진다면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숨이 가빠진다면
멧돼지가 오는지 살펴봐야 한다
- 김기택, 「멧돼지가 온다」 중에서 -
요즈음 들어 걸핏하면 서울 시내 곳곳에도 멧돼지가 출몰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등산길에 마주치는 거야 어쩔 수 없다. 누구의 텃세가 정당한지 애매하다. 하지만 공원이나 골목을 배회하다간 주차장을 질주하기도 하고 평온한 식당에까지 들이닥치는 놈도 있다.
그들과 함께 사는 문제를 고민하긴 해야 하지만 그런다고 다 측은지심을 느낄 필요는 없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숨이 가빠져도' 사냥꾼처럼 숨을 고르고 냉철하게 방아쇠를 당겨야 할 때가 있다.
특별히 오늘 만나는 멧돼지에겐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말자.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것 우리가 찾으러 (0) | 2024.12.08 |
---|---|
우리는 명령한다 (0) | 2024.12.07 |
외치며 사나니 (0) | 2024.12.06 |
'겨울공화국'을 사는 상식과 윤리 (0) | 2024.12.06 |
어느 민족 누구게나 (0) | 2024.12.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