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름 새에 친구 어머니 두 분이 90대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모두 건강하셨다가 한 분은 입원한 지 10여 일 만에, 그리고 또 다른 분은 급작스레 상태가 위독해지셔서 몇 시간 만에 눈을 감으셨다. 장례식장 분위기는 침울하지 않았다.
조문을 마친 뒷자리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이별의 기억이 좋을 만큼 알맞게 아프시고 돌아가셨네."
"복이 많으셔서 마지막도 큰 고생하지 않으셨네."
"호상이지 뭐."

'알맞게', '복이 많으셔서', '호상'이라······.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악의 없이 정형화된 의도이고 말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나는 이럴 때 '세상에 사람이 죽었는데 호상이 어딨어?'라고 소리를 지르던 강풀의 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만석할배가 떠오른다.
할배는 떠난 사람을, 죽기 위해서가 아닌 살기 위해 살았던 사람을 생각한 것이다.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 김춘수, 「강우(降雨)」-
초상집에 다녀오면 아내와 우리 차례도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농담을 나누곤 한다.
그러다가 시쳇말로 '현타' 같은 것이 문득문득 서늘하게 온다.
죽음은 한치 앞을 못 보게, 느닷없이, 퍼붓는, 드센 빗줄기다.
어쩔 수 없는, 대책이 없어 풀이 죽게 만드는 '폭력'이다.
떠난 사람에게도 남은 사람에게도.
호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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